가해자 ‘도려내기식’ 그쳐선 안돼
권력형 성폭력 차단은 한계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연일 쏟아지는 ‘미투(me tooㆍ나도 말한다)’ 폭로에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반응이 변하고 있다. 철저한 침묵에서 변명과 회피중심의 형식적 사과에서 폭로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으로 양상이 바뀌고 있다. 폭로에서 사과까지 시간도 1주일 안팎으로 짧아졌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가 28일 천주교 수원교구 소속 한 모 신부의 성폭력 사실에 대해 공개사과했다. 김 대주교는 28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 피해자와 그 가족은 물론, 사제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모든 분께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사건을 거울 삼아 속죄하고, 사제들의 성범죄에 대한 제보의 사실여부를 철저히 확인해 교회법과 사회법 규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덧붙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가 사제의 성폭력 사실에 대해 28일 공개사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천주교의 사과는 이번이 두번째다. 지난 23일 한 여성신도가 2011년 아프리카 남수단 선교 봉사활동 당시 성추행 피해에 이어, 강간까지 당할 뻔했다고 폭로했고, 이로부터 이틀 뒤인 25일 이용훈 수원 교구장이 신도들에게 사죄 서한을 보내 교구차원에서 사과한 바 있다. 최초 폭로부터 교회차원의 사과까지 5일이 걸렸다. 김 대주교는 사과와 더불어 5~9일 주교 정기총회에서 사죄 성범죄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박제동 화백.[사진=연합뉴스] |
그런가 하면 유명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도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했다. 웹툰작가 이태경이 과거 박 화백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갔다가 성추행과 성희롱을 당했다고 폭로(26일)한지 이틀만이다. 박 화백는 언론사에 사과문을 보내 “이태경 작가에게 사과하고 이 작가의 아픔에 진작 공감하지 못한 점도 미안하다”면서 “아울러 수십 년 동안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여성에 가했던 고통도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더불어 ‘미투’운동을 지지한다고도 했다.
재빠른 사과에 맞춰 후속 조처도 빨라졌다. 박 화백은 5일 개교예정인 오디세이학교 명예교장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오디세이학교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추진하는 핵심사업중 하나로, 고등학교 1년생이 1년간 공부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다양한 프로젝트, 창의적 자율교육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학교다.
이제는 ‘폭로-사과-조처’로 소수의 가해자를 ‘도려내기 식’으로 배제해서는 권력형 성폭력을 차단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질적 처벌 없이 언론과 여론을 통한 비판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사과’가 ‘면죄부’로 작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심지어 피해자가 ‘명예훼손’으로 역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김종환 법무법인 정향 변호사는 “친고죄 폐지 전의 피해에 대해서는 실질적 처벌이 어려운게 사실”이라며 “성범죄의 경우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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