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협박형 범죄 여전히 기승
최근 현금대신 문화상품권 요구
자녀도 전화 못 받게 작업하기도
지난 6월 22일 오전 10시 피해자 김유신(20·가명)씨의 어머니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OO씨 어머니시죠?” 사투리를 쓰는 50대로 추정 되는 남성의 음성이었다. 통화 질이 잘 좋지 않아서인지, 보이스피싱범이 일부러 이름을 흘려서 말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들의 이름이 정확치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 전화가 온 줄 알고 아무런 의심없이 답했다.
“아니요. 유신이 엄만데요?”
본격적인 보이스피싱범의 연기가 펼쳐졌다. “아이고 드디어 어머니와 연락이 닿았네요. 다름이 아니라 유신이가 지금 많이 다쳤어요.” 어머니는 깜짝 놀라 물었다. “네? 어디가? 얼마나? 왜요?” 어머니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보이스피싱범은 “아드님이 우리에게 ‘깡패같다’고 욕하고 시비를 걸어 싸움이 났다”며 “허벅지를 칼에 찔렸는데 피가 많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들을 바꿔준다 했다. 어머니의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엄마, 나 다쳤어. 나 좀 살려줘”
전화기 저편에서 들린 것은 분명히 아들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올해 스무살이 된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상태였다. 평소 얌전한 아들이지만 바깥에서 친구들과 놀다보면 충분히 시비가 붙을 수도 있을 법 했다. 어머니는 “애들이 어려서 뭘 잘 모르고 그런 것이니 이해해달라”고 사정했다.
보이스피싱범은 돈 250만원을 요구했다. 현금을 요구하던 보이스피싱범은 어머니가 돈을 찾았다고 하니 이제는 편의점에서 돈을 문화상품권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편의점에서 문화상품권을 사고 영수증을 받으면 핀(PIN) 번호가 나오는데 이를 불러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편의점 6~7군데를 돌며 문화상품권을 쓸어담았다. 편의점 한곳에선 수백만원어치 문화상품권을 보유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핀번호를 보이스피싱범에게 수도없이 불렀다. 핀번호를 부르고 나니 3~4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손에는 땀에 젖은 문화상품권 영수증만 70장이 넘었다.
전화기 배터리가 다돼 전화가 끊어진 후에도 아들 걱정뿐이었다. ‘혹시라도 아들에게 해코지 하면 어찌할까.’ 어머니는 파출소를 찾았다. “아들이 안전한지 확인 좀 해주세요” 발을 동동 굴렸다. 경찰이 위치추적을 했더니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날려버린 돈 보다 아들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보같았지만 다시 그 상황에 처한다면 어머니는 또 똑같이 행동할지도 모른다. 일단 자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정상 사고가 불가하기 때문이다.
자녀 협박형 보이스피싱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막상 자식이 위험에 빠졌다고 하면 부모들은 자식의 위험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기꺼이 덫에 몸을 던진다. 그래서 나중에 보이스피싱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부모들은 자식이 위험에 처했다가 살아난 것처럼 “살아있어 고맙다”고 말한다.
해당 사건은 서울 마포경찰서가 수사중이다. 경찰이 문화상품권 핀번호를 조회한 결과 중국에서 게임머니로 바꿔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범이 자식이 전화를 받지 못하도록 작업을 해놓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화를 끊고 자녀에게 전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더 말려들게 된다”며 “일단은 무조건 전화를 끊고 경찰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세희 기자/say@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