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낸 성과 이외에도 재계의 ‘큰 어른’으로 족적을 남겼다. 한국 재계 사상 처음으로 생전에 회장직을 스스로 내려놓은 데 이어, 버섯연구를 비롯한 취미, 자연과 함께하는 사회공헌활동에 매진하면서 은퇴 후에도 많은 경영인들의 귀감이 됐다.
구 명예회장은 LG에 몸담은 지 45년, 선친 구인회 LG 창업주의 타계로 회장을 맡은 지 25년 만인 1995년 2월 자진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국내 기업사에서 처음으로 ‘무고(無故, 아무런 사고나 이유가 없음) 승계’ 사례로 기록되며 재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을 비롯해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동반퇴진’을 단행했다.
LG그룹에 따르면 고인은 은퇴를 결심하면서 멋진 은퇴보다는 ‘잘 된’ 은퇴가 되기를 기대했다. 구 명예회장에게 은퇴란 본인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경영 혁신’이었던 셈이다.
구 명예회장 퇴임 후 2000년대 들어 3대에 걸쳐 57년 동안 이어진 구·허 양가의 동업도 아름다운 이별로 마무리했다. 57년간 불협화음 없이 일궈온 구씨와 허씨 양가의 동업관계는 재계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구 명예회장은 은퇴 후 후임 경영진에게 부담을 안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구인회 창업회장이 생전에 강조한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라는 말에 따라 후진들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주고, 어려울 때일수록 그 결심을 철저히 지킨 것이다.
이에 그는 경영에서 물러난 후 충남 천안시에 위치한 연암대학교의 농장에 머물면서 버섯연구를 비롯한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과 사회공헌활동에 전념하며 그룹의 경영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은 또 교육 분야에 각별한 열의를 쏟았다.
이세진 기자/jin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