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순식 기자]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시간·규모·협력이라는 ‘3대 벽’을 넘어야 한다.”
대한상공회의소(회장 박용만)가 24일 ‘소재・부품・장비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건의문’을 정부에 제출했다. 건의문은 지난 8월 정부가 발표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과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투자전략 및 혁신대책’을 보완하는 내용을 담았다. 정부정책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시장기능 활성화를 통해 소·부·장 경쟁력을 높이자는 취지다.
상의는 건의문에서 “지난 10년간 소재부품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 정책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좁히지 못했고 중국과의 격차는 오히려 줄었다”고 지적하면서, “일본 수출규제가 소·부·장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던 만큼 소·부·장 정책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표한 기술수준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2008년→2018년) 소재·나노분야 기술수준 변화를 보면 미국을 100으로 보면 일본은 95.6→98.0로, EU는 93.4→91.7로, 한국은 77.4→78.3로, 중국은 64.3→76.2로 나타났다. 기계·제조 경쟁력도 소폭 개선(74.0→78.1)됐으나 미국・EU과의 차이는 여전하다.
상의는 소재부품 산업에서 선진국과 기술격차가 큰 이유로 시간・규모・협력 등 3대 장벽을 들어 분석했다.
첫째, ‘시간의 벽’이다. 소재 원천기술은 장기간의 연구개발과 막대한 투자비가 든다. 그러나 기술개발을 착수해서 제품출시까지 평균 4~5년이 걸리고, 특히 핵심소재는 20년이 소요된다. 예를 들어, OLED는 1987년 원천소재를 개발했지만 2007년에 상용화됐고, 항공기 기체 핵심소재인 보론-알루미늄은 기술개발에서 제품화까지 20년이 걸리는 등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
둘째, ‘규모의 벽’이다. 소·부·장 산업은 개별시장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한번 선점하면 장기간 시장을 지배하는 특성을 지닌다. 하지만 국내 소재부품 기업은 소규모 기업 비중이 80%로 미국・독일보다 높다. 소규모 기업은 지속적인 기술혁신・가격 경쟁력・안정적 공급역량 등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
셋째로 ‘협력의 벽’이다. 시간과 규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산·학·연 협력이 돌파구가 될 수 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우리나라 산·학·연 협력 순위는 지난 2009년 133개국 중 24위에서 2019년 141개국 중 31위로 후퇴했다. 같은 기간 이스라엘은 21위에서 1위로 점프했다.
상의는 “기존 경로를 쫓아서는 시간·규모·협력이라는 3대 허들을 넘기 어려우므로 정책도 혁신이 요구된다”면서, “▷오픈이노베이션, 해외M&A 등으로 혁신의 분업화를 유도하여 ‘시간의 벽’을 극복하고, ▷국내외 M&A 활성화, R&D효율성 제고 통해 ‘규모의 벽’을 넘으며, ▷협력 인센티브 개선으로 ‘협력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상의는 건의문에서 소·부·장 경쟁력 강화를 위한 4대 부문 14개 세부과제를 제시했다.
우선 R&D 부문에서 기업 R&D투자 촉진을 위해 혼합형 R&D세액공제 도입, 공동·위탁연구 인센티브 확대, 특허박스 도입 등 R&D 지원제도의 획기적 개선을 주문했다.
먼저 R&D 투자활동에 대한 세제상 인센티브 강화가 필요하다. 현재 기업은 R&D 투자금의 당기분과 증가분 중에서 선택해서 세액공제를 받는다. 그러나 증가분 방식은 연구비가 전년대비 100%이상 늘어야 한다는 과도한 규정 때문에 유명무실하다. 이에 상의는 R&D 투자금의 당기분과 증가분 방식을 혼합해 기업 R&D 투자를 적극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동·위탁연구에 대한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 공동·위탁연구는 R&D 리스크 헤지와 핵심기술의 빠른 취득을 위해 중요하다. 이에 위탁연구 인정범위를 국내소재 연구기관에서 해외소재 연구기관까지 확대시키고, 일본・프랑스처럼 일반 R&D보다 세액공제를 더 많이 해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특허박스 제도’ 도입도 요청했다. 한국은 GDP 대비 R&D 투자비중이 OECD 국가 중 1위다. 하지만 사업화율이 낮고, 특허 피인용률 등 특허성과도 저조한 ‘Korea R&D 패러독스’를 겪고 있다. 특허권 등 지식재산권에서 발생하는 소득은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특허박스 제도’가 R&D 사업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국내외 M&A 활성화를 위한 제도개선도 요청했다. 지난 8월 정부대책에서 해외 소부장 기업 M&A시 세액공제 제도가 신설됐지만, M&A 이후 발생하는 소득에 대한 국제적 이중과세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OECD 34개국 중 29개국은 이중과세 방지를 위해 해외배당소득을 자국의 과세대상에서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외국납부세금의 일정한도만 공제하고, 공제한도 초과분에 대해서는 이월공제기간도 5년에 불과하다. 건의서는 해외배당소득에 대해서는 ‘과세면제제도’를 도입하거나 외국납부세액 이월공제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견기업의 M&A 활성화를 위해 중소기업 지원제도 정비도 필요하다. 현재 대기업이 중소・벤처기업을 인수할 경우 피인수 기업은 7년간 중소기업 지위를 유지하지만, 중견기업이 해당기업을 인수할 경우 중소기업 지위 유지기간은 3년에 그치는 불합리한 점이 있어 개선이 요구된다.
이번 정부대책 중 중요하게 다뤄졌던 협력생태계에 대한 보완책도 주문했다.
기업간 파트너십 구축을 위해 소・부・장 중소기업에 대한 지분투자를 ‘투자・상생협력촉진세제’상 투자로 인정해야 한다. 도요타・인텔 등 외국은 기업간 지분투자를 통해 협력업체와 긴밀한 파트너십을 구축하여 동반성장, 신시장진출에 적극적이다. 반면 국내 상장사의 다른 법인 주식인수는 답보상태다.
소·부·장 산업에 대해서는 상생협력촉진법상 상생협력의 대상을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확대하고, 대기업의 중견기업 지원도 조특법상 상생협력 출연금으로 인정해야 한다. 대중소 상생협력제도 취지가 협력 당사자인 중소기업의 경쟁력 제고에 있는 만큼 소·부·장 산업에서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협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 소・부・장 산업생태계를 강화하기 위해 해외진출 기업의 국내 U턴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미국은 복귀기업이 2,400개에 달하지만 한국은 같은 기간 52개사에 그치고 대기업은 전무한 실정이다. 기업 U턴 활성화를 위해 해외사업장 부분 철수 후 국내창업, 사업장 신설에 국한된 U턴 인정범위를 국내사업장 증설도 포함할 필요가 있다.
연구장비 기업의 육성을 위한 인프라 조성도 촉구했다. 상의는 국내 연구장비 개발산업이 성장하면 선도적 연구수행 뿐만 아니라 국가연구장비 예산 절감과 일자리창출 등 효과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밖에 일본 수출규제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한 계열사간 거래는 과세대상에서 제외해줄 것도 요청했다. 소·부·장 대책에 따라 핵심 품목을 국산화할 경우 불가피하게 내부거래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재근 대한상의 산업조사본부장은 “이번 건의문은 업계와 전문가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해 마련했다”며, “정부가 예산・세제・금융・규제개선 등 전방위적 종합지원을 마련하고 있지만, 이번 기회에 3대 장벽을 넘어설 수 있도록 지원 인프라를 더욱 보완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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