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경제 저성장 못벗어난 요인
기저효과로 올 GDP 2.1% 성장
반도체 반등·무역갈등 줄어들 것
제조업 경쟁력 저하 속 인구쇼크
중국보다 앞선 건 반도체·OLED뿐
법인세 감면·노동유연성 확보 등
OECD 평균 수준 돼야 경제활력
기준금리 추가인하땐 부동산 ‘쏠림’
정부정책 ‘공정경제>혁신성장>소주성’
이동근 현대경제연구원장은 헤럴드경제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반도체 업황의 개선과 최근 진전된 미·중 협상 등이 새해 경기 반등을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섭 기자 |
[대담 : 정순식 재계팀장] “지금은 나라 안에서 경쟁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경쟁은 국가 간에 이뤄지고 있습니다. 제발 글로벌 시각에 노동, 환경 규제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시각을 넓힐 때 입니다”
이동근 현대경제연구원장은 2020년을 맞기 불과 며칠을 앞두고 세밑에 이뤄진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줄곧 악화된 기업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노동과 환경 규제가 강화되며 기업 경영 환경이 크게 후퇴했다는 지적이었다. 이 원장은 무역분쟁과 경기 둔화 등으로 대외 환경이 악화된 가운데 내적인 요인 마저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지난해 한국 경제는 부진한 성적표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했다. 특히 핀테크, 바이오, 자율주행 등 신산업 분야의 성장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와 기득권 저항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제는 국민감정에서 벗어나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규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다만 새해 국내 경기는 전년보다 나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 원장은 반도체 업황의 개선과 최근 진전된 미·중 협상, 동북아 외교갈등 완화가 올해 경기 반등을 이끌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 또한 기저효과라는 한계가 상존한다. 이 원장은 주 52시간 근무제를 비롯한 노동정책과 갈수록 심화되는 반기업 정서가 기업들의 ‘코리아 엑소더스(대탈출)’를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가속화된 인구 감소와 중국의 성장 등 대내외 환경의 급변 역시 한국 경제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는 요소로 꼽았다.
▶올해 경제성장률 2.1%…반도체 반등·무역갈등 해소=이 원장은 올해 국내 GDP 성장률이 2.1%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성장률 전망치(1.9%)보다 소폭 나아진 것이지만 작년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았던 만큼 기저효과 요인이 가장 크다는 설명이다.
실제 우리나라 수출액은 지난 2018년 12월 이후 13개월 연속 감소세를 기록 중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수출증가율은 -10.3%의 두 자릿수 감소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두 자릿수 감소율을 기록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쳤던 2009년(-13.9%) 이후 10년 만이다.
그는 하지만 국내 수출의 21%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의 반등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재고 소진으로 가격과 물량이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이 원장은 “5G를 비롯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산업의 발전으로 각 나라에서 데이터 센터를 많이 지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4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반도체 경기도 점차 좋아질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이 원장은 올해 수출도 소폭이지만 2.3%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정부는 3% 수준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외 불확실성이 조금씩 걷히고 있는 점도 반가운 요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의 1단계 무역합의에 오는 15일 서명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을 노리는 만큼 협상 분위기는 전년보다 진전될 것이란 분석이다.
이 원장은 “대중(對中)·대일(對日) 관계도 점차 좋아질 것이다. 올해 상반기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방한을 계기로 국내 관광과 한류 산업도 다소 숨통을 틔울 것이다”라며 “일본의 수출규제에 따른 소재·부품·장비 대책은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대외환경 나빴지만…국내 규제도 ‘저성장’에 한몫=이 원장은 국내 경제가 저성장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배경으로 노동과 환경 부문 규제를 꼽았다. 대외 환경이 무역분쟁 리스크로 악화된 가운데 국내에선 근로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 등의 대내 규제요인까지 겹치면서 경기 부진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이 원장은 “대외 요인은 우리가 손댈 수 없지만 대내 요인은 정책으로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 및 환경 규제, 신산업 규제 강화로 국내 투자환경은 악화됐다”고 토로했다.
특히 신산업의 경우 각종 규제와 법령의 미비로 사업 진출 자체가 가로막힌 점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례로 빅데이터 산업은 개인정보보호법 규제, 바이오 산업은 생명윤리 관련 규정 때문에 발전이 더디다고 지적했다. 최근 ‘타다’ 사태에서 보듯 기득권의 강한 반발 역시 큰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는 “정부가 조금만 풀어주면 국내 산업 환경은 제조업에서 신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신산업도 국가가 허용한 것만 하라는 분위기다. 국내 규제가 강하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글로벌 기준에 맞게 규제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부터 30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된 주 52시간 근무제도와 관련해서도 처벌이 1년간 유예됐지만 불확실성은 여전하다고 지적한다. 이 원장은 그러면서 민주노총이 한국노총을 제치고 제1노조로 올라서면서 정부 정책의 친노조 성향이 보다 강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주 52시간제를 시행은 하되 단속은 안 한다는 것이니 기업은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며 “반대가 지속되면 1년 뒤에 재차 유예할 것인지, 경영진은 법적으로 완전히 보장해줘야 안전하다는 입장”이라고 아쉬워했다.
▶제조업 경쟁력 떨어지는데…인구쇼크마저 부담=현대경제연구원은 국내 고용시장의 불안요인으로 주력산업인 제조업과 건설업의 취업자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는 점을 지적했다. 제조업 생산능력 지수는 최근 7분기 연속 하락세(전년 동기대비)를 지속했다. 이는 제조업 기업이 구조조정 및 투자 축소를 통해 생산 능력을 줄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원장은 이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그는 “반도체와 조선을 제외하곤 올해 국내 산업에서 뚜렷한 성장세를 예상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철강을 비롯해 자동차, 석유화학 등 과거 국내 경제를 지탱하던 산업들이 일제히 한계에 봉착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가격 및 기술 경쟁력에서도 중국이 앞서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중국보다 앞선 건 반도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뿐이다. 나머지는 오히려 중국 제품의 가격이 더 싸다”라며 “반도체는 중국보다 기술력이 5년 정도 앞서 있다고 하지만 액정표시장치(LCD)의 경우 우리는 가동을 중단하거나 공장을 폐쇄하고 있다. 중국이 자립하면서 더 이상 우리나라 수출이 크게 증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반기업 정서 역시 국내 제조업의 쇠퇴를 부추기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특히 가업 상속에 대한 부정적 인식 탓에 중소기업들은 해외로 이전하거나 사업을 아예 접고 있다고 뀌띔했다.
이 원장은 “예전엔 ‘반 대기업 정서’가 있었다면 지금은 ‘반기업 정서’가 강하다”며 “일본과 독일은 축적된 기술을 자식이 물려받아 히든챔피언이 되는데 우리는 상속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다. 중소기업인들의 1순위 요구가 가업상속 제도 개선”이라고 역설했다.
인구감소 역시 잠재적으로 국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전망이다. 통계청은 올해 6월부터 출생아보다 사망자가 더 많은 인구 자연감소가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원장은 “여성과 고령자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높이는 한편 이민자를 수용해서 생산가능인구에 포함하는 것이 방법이지만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인 탓에 쉽지 않다”고 우려했다.
▶디플레 우려는 시기 상조…잠재성장률 높이려면 생산성 향상 담보돼야=지난해 9월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사상 첫 마이너스(-0.4%)를 기록하면서 디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졌지만 이 원장은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낮게 봤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올해 물가상승률을 1.0%로 전망했다.
이 원장은 이에 대해 “국민 체감물가 자체가 높은 상황”이라며 “공산품 등 전반적으로 물건이 안 팔리는 것이 디플레이션인데 지금은 그렇진 않다”고 설명했다. 전셋값을 비롯해 주거비, 전력요금 같은 공공요금과 교육비 등 인상요인이 많다는 설명이다.
이 원장은 한국 경제의 활력을 위해 법인세 감면과 노동유연성 확보, 반기업 정서 완화로 잠재성장률을 높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이 가운데서도 노동유연성을 특히 강조했다.
이 원장은 “생산인구나 경제활동인구 감소로 노동 투입인원이 줄어들고 있는 만큼, 노동 생산성이라도 높여야 하는데 노조가 강해 그러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며 “노동유연성 확보로 노동 전반의 가격 자체를 낮춰야 수요 공급이 맞춰질 것이다”고 설명했다.
법인세 역시 OECD 평균 수준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준 선진국에 맞는 제도나 정책을 가져야만 해외 기업의 국내 진입은 물론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활성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국내적 시각을 고수하면 민족감정, 국민감정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포퓰리즘 정책이 나올 수 있다”며 “글로벌 기준에서 제도를 만들고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금리는 불가피…갈 곳 없는 자금 부동산 쏠림 부작용=뜨거운 감자 기준금리에 대해 이 원장은 올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한 차례 인하할 것으로 내다 봤다. 기준금리 인하로 가계와 기업의 대출부담 완화에 따른 경기활성화를 꾀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이다. 하지만 부동산으로 유동자금이 쏠리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동시에 제기했다. 그는 “전 세계가 저금리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금리가 아주 낮은 건 아니다. 일본이나 유럽보다는 좀 높다”라며 “미국이 현 1.75% 금리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우리 기준금리가 한 차례 인하되더라도 0.5~0.75% 정도의 차이를 유지해 자본유출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다만 금리 효과에 대해선 유보적 입장을 보였다. 금리 인하가 민간소비 확대를 가져오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양질의 일자리가 제한적으로 증가하는 데다 대외 불확실성에 따른 소비심리 악화로 민간소비가 크게 개선되기 어렵다고 전망했다. 이 원장은 특히 기업의 경우 중국과의 경쟁에 더해 신산업 규제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면서 현금 보유만 늘리고 있는 상황에서 기준금리 인하가 효과를 발휘하 지 못할 수 있다고도 봤다.
▶文정부 경제정책 ‘공정경제〉혁신성장〉소주성’=이 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에서 공정경제에 대해 가장 높은 점수를 줬다. 대기업 갑질이 이전보다 개선됐고, 불공정거래를 줄이는 데 기여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생 분위기가 뚜렷해졌다는 설명이다.
혁신성장의 경우 정부가 3대 신산업(미래차, 바이오, 시스템 반도체)을 중심으로 드라이브를 걸면서 발전을 꾀하고 있지만 여전히 관련 규제는 개선요소로 지적했다.
이에 비해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선 예전보다 언급 빈도나 전반적인 관심도가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이 원장은 “정부 발표나 고위관료 입에서 소주성이란 표현이 안 나온다. 애당초 취지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급하게 추진하면서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제도로 되레 소득이 줄어버렸다”며 “실패라기보다 서서히 언급을 안 하면서 없어지는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정리=김현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