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함께 이룬 경제성장의 혜택이 소수의 상위계층과 대기업에 집중되었고, 모든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낙수효과는 끝났습니다. (2019년 1월 10일 기자회견 신년사)
#. 삼성·현대차 등 대기업 그룹이 조 단위의 경영안정자금을 긴급 지원하기로 하여 협력업체들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대기업들이 앞장서 주시니 더욱 든든하다는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2020년 2월 13일 코로나19 대응 경제계 간담회)
소개한 두 발언은 모두 문재인 대통령의 입을 통해 전 국민들에게 전달된 메시지다. 불과 1년여의 시차다. 낙수효과를 부정하던 대통령은 1년 후에 전염병으로 급격히 가라앉는 내수경기의 구원투수로 대기업을 등판시켰다. 초청 대상도 그룹의 최고경영자(CEO)가 아니라 총수들이었다. 적어도 이를 보면 대기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1년 사이 크게 달라진 건 분명해 보인다. 양극화의 주범에서 경제의 한 주체로 인정된 것으로 해석된다.
대기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갈리는 건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호불호는 결국 양극화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나뉜다. 대기업이 시장을 독과점하고, 하청 기업과 근로자들의 과실을 가로채 자신들만 배를 불리는 원흉이라 주장하는 이들은 대기업을 양극화의 주범으로 본다.
반면 대척점에서 대기업의 불가피론을 외치는 이들은 철저히 수출 등 대외 무역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주목한다. 인구 5000만, 내수로 성장이 불가능한 우리 경제는 결국 해외로 물건을 내다팔아 부가가치를 창출해 왔다. 전쟁터와 다름 없는 기업 간 경쟁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 대기업은 결국 필요악과 같았다는 게 대기업 인정론자들의 주된 논리다. 그리고 해외에서 벌어들인 이 부가가치가 곧 사회 전반의 삶의 질을 은연중에 개선시켰다 주장한다. 이 주장이 다름 아닌 지난해 문 대통령이 끝났다고 선언한 ‘낙수효과’다.
양극화의 원인 한가운데 이처럼 대기업이 있지만, 애석하게도 양극화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정하기 불편하지만, 양극화는 유사 이래 가장 경쟁력 있다 평가받는 경제 이념인 자본주의의 필수 부산물인 듯싶다. 정치이념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중국에서도 양극화는 맹위를 떨친다.
결국 양극화를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면, 적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적 논쟁은 피하는 게 현명한 접근이다. 그런 면에서 이상을 추구하던 모습에서 현실과의 접점을 찾는 듯한 문 대통령의 현실 인식은 적절해 보인다. 다만 아쉬움은 있다. 인식의 전환이 낙수효과를 강요하는 모습이 되어선 곤란하다.
지난 13일 삼성은 간담회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졸업식, 입학식 등 각종 행사가 취소, 연기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화훼 농가를 위해 ‘꽃 소비 늘리기’에 적극 동참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국 각 사업장의 사무실과 회의실에 꽃 비치를 늘려 근무 분위기도 부드럽게 하면서 꽃 소비도 늘리는 데 기여할 방침이라고 했다. 총수가 참석한 뒤 내놓은 대책이라기엔 무언가 지나치게 궁색한 느낌이 든다.
낙수(落水)는 떨어지는 물이다.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넘치는 게 낙수효과다. 강제로 바가지에 물을 떠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