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주희·유동현 수습기자]#2016년 3월, 20대 총선을 채 한달도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과 갈등 끝에 공천장에 도장(대표 직인)을 찍어줄 수 없다”며 부산으로 갔다. 유승민 의원 등 비박계(비박근혜계)의 탈락에 이 계파 좌장으로 꼽히던 김 대표가 반발한 것이다. 이른바 ‘옥새 파동’으로 살생부·막말 논란에 이어 당시 친박·비박계 대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에서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일부 친노·친문계 인사를 공천 배제한데 대해 당 내 반발이 일자 당무를 거부하고 자택에 칩거한 일이 있었다.
국회 본회의 모습 [연합] |
#1991년 5월 신민당 중앙당 국장 4명이 기습적으로 당사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광역의원선거 후보자 공천을 두고 “도대체 당 공천심사위의 심사기준이 뭔지 알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당이 운영된다면 당장 국회의원을 그만 두겠다” 등 불만이 속출하면서 시작된 단식농성이다. 당시 신민당에서는 공천에 불만을 품은 최고위원이 회의 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모습도 흔하게 연출됐다.
#1960년 5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민주당 지방당원 30여명이 서울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 의원의 집을 향했다. 이들은 곽상훈, 박순천 최고위원이 탄 차량을 막고 공천에 항의했다. 욕설은 물론 폭행까지 더해진 이들의 시위에 백남훈 최고위원과 현석호 조직부장은 윤 의원 집 뒷문으로 도망치듯이 나와야만 했다.
우리 정치 역사에서 ‘공천 파동’은 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됐다. 당의 인사와 재정을 쥔 강력한 당수가 공천을 밀어붙이던 시절에도, 공천권을 당 대표가 내려놓은 지금에도 여전하다.
지역구 경선, 오픈프라이머리 같은 승자와 패자 모두 인정할 수 있는 공정 경쟁이 아닌, 지도부 특정인의 판단, 또는 계파간 조율에 의해 ‘선수’가 뽑히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다.
역대 총선에선 최근까지도 여야나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공천 결과에 불복하고 탈당하거나 심지어 당이 쪼개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민정계 학살이 있었다. 이 총재는 김윤환으로 대표되는 민정계 정치인과, 또 꼬마 민주당에서 들어온 이기택 의원 등 모두 43명의 현역 의원들을 대거 공천에서 제외했다. 우리 정치권에서 ‘공천학살’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2019년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이회창 공천 모델’을 배우겠다”고 언급하며 대대적인 현역 물갈이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범민주진영에도 물갈이와 불복에서 예외가 아니다. 2008년 총선을 앞둔 통합민주당은 박재승 공심위원장을 앞세워 텃밭 호남에서 30%의 현역을 컷오프했다. 설훈 의원은 공천 심사도 받지 못하자 당사 내 공관위원장 방을 점거하고,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창가에서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choijh@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