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기술의 최강국’으로 불리는 미국과 독일, 일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몇 차례의 큰 전쟁을 주도하면서 압도적인 군사력 확보를 위해 국가 차원의 집중적인 기술개발 투자가 이뤄졌다는 점일 것이다. 국방기술은 연구·개발에 있어 경제성의 논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첨단 핵심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확보하는가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어왔다. 국방에서 파생된 첨단기술은 민간 산업 분야로 확산되며 산업기술 발전을 이끄는 초석이 되었다. 군수품 생산에 활용된 기계기술은 현대 정밀기계기술의 효시와 다름없다. 인류의 달 탐사를 현실로 만든 로켓 발사는 미사일 탄도 계산에서 시작됐으며 차량용 내비게이션에 널리 쓰이는 GPS가 미-소 냉전시대 군사정찰 목적 위성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첨단 국방기술 분야의 연구·개발 투자를 지속하되, 새로운 주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민간과 공공의 연구수행 영역을 구분하는 등 다채로운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정부도 국방기술 연구·개발에 있어 전문연구기관이 수행하던 기존 방식에서 다양한 연구 주체가 새로운 시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길을 터주고 있다.
특히 지난 2018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도로 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원자력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과 함께 미래 국방력 확보를 위해 협력하기로 한 것은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
정부뿐 아니라 출연연도 자발적으로 연구·개발 환경에 변화를 꾀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2019년 기관별로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담은 R&R를 정립했다. 지금까지 연구과제중심제도(PBS)를 바탕으로 연구·개발을 추진하면서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중장기 연구에 쉽게 나서지 못했던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제 출연연의 눈을 민간이 선뜻 나서기 어렵지만 누군가 해야만 하는 첨단기술이 필요한 분야로 돌려야 한다. 또한 이는 연구의 파급효과가 산업으로 확산돼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는 분야여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분야로 단연 국방기술을 꼽고 싶다. 앞서 언급했듯 국방기술은 경제성에 앞서 고도의 기능성 기술과 신뢰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국방 분야에 필요한 첨단기술 수요는 연구기관이 도전해야 할 영역을 비춰주는 등대가 될 수 있다.
최근 열린 국방산업발전협의회에서는 우리 군에 필요한 국방부품 생산을 위한 국산 기술 확보를 비롯해 무기 체계의 핵심 부품기술을 민간에 이전해 세계 방위산업시장에 진출하는 방안을 모색했다고 한다. 군은 미래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필요한 기술 발굴에 나서고, 다양한 영역의 연구·개발 역량을 갖춘 출연연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오랫동안 이어온 접근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전혀 다른 관점의 접근으로 속도를 내기도 한다. 이 과정이 유기적으로 일어날 때 기술의 혁신적인 진보가 이뤄질 수 있다.
출연연의 정체성과 나아갈 길에 대한 밑그림은 끝났다. 이제 퍼스트무버로서 새로운 첨단 기술개발에 지체 없이 나서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국방기술 분야가 필요로 하는 첨단기술, 고도의 신뢰성을 확보한 기술은 출연연이 도전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품고 있고, 여기 도전하는 것은 출연연의 마땅한 책무다.
박상진 한국기계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