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너무 늦게 찾아왔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광주 5·18 민주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한 것을 두고 연이틀 정치권이 들썩거리고 있다. 보수정당 대표가 광주서 무릎을 꿇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서 ‘진정성’을 몸소 보여준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김 위원장은 지난 19일 비대위원장 취임 후 처음으로 광주를 찾아 “광주 정신을 훼손한 정치인에 회초리를 못 들어 당 책임자로서 사과한다”고 말했다. “벌써 100번이라도 사과하고 반성했어야 마땅한데 이제야 그 첫걸음을 뗐다”고 울먹이기도 했다.
81세 노(老)정치인의 ‘무릎 사과’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은 손뼉을 쳤다. 일부 “망언 의원부터 제명해야 한다”는 항의도 있었지만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지난해 5월 황교안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광주를 찾았다 ‘물세례’를 받은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누그러진 분위기였다.
통합당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한지 86일, 김 위원장은 취임 이후 줄곧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영남지역에 국한된 통합당 지지층을 확장하지 않고서는 차기 대선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다. 그가 비대위 출범 당시 “호남에서 외면 받으면 이 정당엔 미래가 없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통합당은 지난 4·15 총선에서 호남지역에 후보 12명을 공천했다. 전체 의석 28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숫자다. 사실상 호남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가 나왔다. 득표율 역시 4%대에 머무르며 당선인을 배출하지 못했다.
‘김종인 체제’에서는 달라졌다. 김 위원장은 당의 정강·정책에 5·18 민주화운동 정신 계승 명시를 추진하는가 하면, 당내 국민통합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5·18 유공자 연금 지급 법안을 발의하는 방안도 준비 중이다. 지난 10일 직접 청바지에 장화를 신고 더불어민주당보다 먼저 전남 구례 수해현장을 찾아 봉사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전날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5·18 문제는) 통합당도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확신한다”며 “과거와 같은 편협한 생각을 버리고 전 국민을 포용하는 정당으로서의 기틀을 확립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의 이러한 행보는 호남뿐만 아니라 중도층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광주·전라 지역에서 통합당 지지율이 소폭 올랐을 뿐만 아니라 일부 여론조사 전체 지지율에서도 민주당을 넘어서며 여야 지지율 역전현상, 이른바 ‘데드크로스(Dead-Cross)’를 달성했다. 지난 2016년 10월 국정농단 사태 이후 46개월 만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8월 2주차 주간집계 결과 통합당의 지지율은 36.3%를 기록하며 34.8%의 민주당을 앞섰다. 광주·전라 지역에서도 총선 직후 9%대던 지지율을 14.1%까지 끌어올렸다(YTN 의뢰, 전국 2515명, 95% 신뢰수준 ±2.0%p,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정부여당의 부동산정책 논란 외에도 ‘김종인 비대위 체제’ 출범 이후 지속되는 체질개선과 원내투쟁, ‘호남 끌어안기’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다. 정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