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박일한 기자] 수도권 주택공급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요즘 자꾸 떠오르는 말이 있다. 어디선가 읽었던 발터 벤야민이란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다. “항상 그때그때의 1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남산서울타워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헤럴드경제DB] |
집값 이야기를 할 때 만나는 흔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먼저 집에 대한 ‘당위’와 ‘이상’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집은 사는(Live) 곳이지 사는(Buy) 곳이 아니다’라거나, ‘집값이 임금에 비해 너무 비싸니, 집값을 원상회복 시켜야 한다’며 흥분한다. ‘사는 집으로 사람을 평가해선 안된다’, ‘누구나 집 걱정 없이 살 권리가 있다’ 같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들은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묻는 질문엔 대체로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저 ‘이미 우리나라에 집은 충분한데 다주택자가 문제’라거나, ‘다주택자가 집을 내놓게 세금 등 규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등의 익숙한 말들을 쏟아 놓는다. 문재인 정부가 얼마 전까지 가졌던 태도다.
이들은 말하자면 1보 앞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면서 ‘집 걱정 없는 세상’이란 2보, 3보, 아니 100보 앞 이상향을 이야기 한다. 그나마 1보 앞으로 나갔다며 내놓는 대책이란 게 전세금을 강제로 못 올리게 한다거나, 아직 2기 신도시 공급도 수십만가구나 남아있는 상황에서 3기 신도시를 공급한다는 낡은 대책이다. “수도권 127만 가구 공급 대책이 불과 몇 달 전 나왔는데, 또 무슨 공급대책을 내놓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미 공급하겠다고 계획한 거나 제대로 빨리 해봐라” 시장의 반응이 딱 이렇다.
또 다른 유형은 ‘무능’하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다. 2보, 3보 앞을 걱정하면서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어찌어찌될 건데, 지금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어’ 같은 말을 자주 한다. 두세 발 뒤 상황을 걱정하면서 한발 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최근 만난 한 부동산 전문가는 기본적으로 수도권 집값을 잡기 위한 방법으로 서울 강남이든 어디든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다. 다만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선 답답할 만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서울과 비견될 만한 다른 주요 도시와 비교하면 서울은 용적률이 낮은 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적률을 높이는데 대해선 반대했다. 도심 주거 환경을 망치면서 결국 집주인, 투기꾼에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대안이라고 제시한 게 도심 유휴부지 등을 찾아 개발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역세권 등에 공급을 대폭 늘리면서 개발 이익은 철저히 회수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오래 전부터 집값 상승기면 수없이 반복하던 레퍼토리였다. 그걸로 공급이 제대로 되겠느냐고 반문했지만, 그것밖에 문제없이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역시 어디선가 무수히 들어본 이야기다.
정부와 전문가들이 1보도 내딛지 못하면서, 100보 앞 이상형을 꿈꾸거나, 2보, 3보 앞을 걱정하는 사이 주택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코로나19 상황, 고용 불안, 경기 하락에 대한 우려 등에도 집을 사야겠다는 사람들은 역대 가장 많아졌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1월 수도권 ‘매수우위지수’는 111.5로 2006년 11월(139.5) 이후 14년 2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경기 지역 매수 심리가 높아진 게 이유다. 경기 매수위우지수는 117.2로 역시 2006년 11월(140.2) 이후 가장 높다. KB국민은행 회원 중개업소를 대상으로 조사하는 이 지수는 0~200 사이로 100보다 높으면 높을수록 사겠다는 사람들이 매물 보다 많다는 이야기다.
자연스럽게 집값 전망도 상승쪽이 훨씬 많다. 1월 수도권 ‘KB부동산매매전망지수’는 126.9로 2015년 3월(129.7) 이후 가장 높다. 이 지수도 0~200 사이로 수도권 중개업자들이 집값이 오를 것이란 응답이 많을수록 100보다 높다.
‘1보 앞도 나가지 못하면서 100보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믿지 말라’ 앞서 말한 철학자가 알려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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