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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금지옥’ 대재앙까지 불과 18년…선진국들 다하는 재정보조 왜 안되나 [홍길용의 화식열전]
2041~2050년 기금 700조원 팔면
주식·채권·부동산 등 자산시장 붕괴
적립금 줄면 보험료 부담은 눈덩이
정부, 말로만 보전약속…책임 회피
선진국은 재정투입, 국민부담 줄여
소득 30% 징발, ‘연금지옥’ 막으려면
보험료·운용수익·재정지원 균형 필요
소득비례연금, 재분배기능 포기 전제
중산층 이하 소득대체율 하락 불가피
공적기능 상실시 강제가입 명분 약화

아포리아(aporia)는 그리스어에서 기원이 된 말입니다. 원래 뜻은 ‘길이 없는 상태’죠.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필사의 판단이 요구됩니다. 깨달음이 필요하죠. 시작은 ‘왜?’라는 질문입니다. 진단이 정확해야 처방도 효과가 있겠지요.

서른 다섯살 국민연금 기금이 ‘아포리아’에 바짝 다가섰습니다. 적립금 적자 전환 시점이 불과 18년 앞으로 다가왔네요. 역대 추정시점 가운데 현재로부터 가장 짧게 남은 시간입니다. 적자 전환보다 고갈 시기를 더 주목한다면 잘못입니다. 연금의 문제로만 봐도 치명적 실수죠.

▶국민연금 700조원 바겐세일 시작 불과 18년 후…자산시장 붕괴되면 경제 ‘대재앙’

35년간 900조원 넘게 쌓인 국민연금 적립금은 채권과 주식 등 자산시장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합니다. 급여 지급을 위해 보유한 자산을 무더기로 팔기 시작하면 재앙적 충격이 불가피하죠. 2041년부터 10년간 국민연금이 팔아야 할 주식·채권·부동산 등은 무려 700조원 어치에 달합니다.

국민연금의 지속적인 대규모 매도로 자산가격이 하락하면 국민의 소득은 줄고 시중 금리는 상승할 것입니다. 경기도 빠르게 급랭할 수 밖에 없겠죠. 최근 금리급등 국면에서 드러났듯이 자산가격 급락은 금융시스템에도 치명적입니다. 국민연금이 한 축을 담당하던 장기채권의 국내 수급 기반이 무너지면 해외에서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해야 합니다. 외채 비중이 커지면 환율 불안에 취약해지고 그만큼 부도 위험이 높아지겠죠. 자산시장 붕괴는 적립금의 잔존자산 가치도 떨어뜨려 고갈 시기를 더 앞당길 수도 있습니다.

국민연금 재정추계 때마다 기금 적자전환과 고갈시기는 계속 가까이 오고 있다.

국민연금 적립금 적자 전환과 고갈 문제는 오래된 난제입니다. 출범 채 10년도 안된 1997년 이미 2025년부터 적립금이 적자(수입〈지출) 전환되고 2033년에는 고갈될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고 하네요. 1998년 보험료율을 6%에서 9%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70%에서 60%로 낮춘 이유죠. 이 때 수령시기도 60세에서 65세로 늦춰집니다.

2003년 1차 재정계산에서 2036년 적자전환, 2047년 고갈이 예상되자 정부는 2007년 소득대체율을 40%로 더 내립니다. 2008년부터는 소득대체율 하락을 보완할 기초노령연금 제도도 시행하죠. 정부재정이 투입된 기초연금이 특효였을까요. 2008년 3차 재정계산에서는 적자 전환과 고갈시점이 2044년, 2060년으로 크게 늦춰집니다. 하지만 저출산 고령화에 투자수익률까지 악화되며 2018년 4차 재정계산에서는 2042년과 2057년으로 시기가 다시 당겨집니다.

최근 이뤄진 제5차 재정추계 결과는 적자 2041년, 고갈 2055년입니다. 현재부터 남은 시간이 불과 18년, 31년이네요. 역대 재정추계 결과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이 남게 됐습니다. 16년만에 다시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수령시기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은 당연한 반응이겠죠.

▶투자수익률 둔화 불가피…소득대체율 하향도 한계

최근 국회예산정책처는 국민연금 적립금 고갈을 늦출 몇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 시기를 가장 많이 늦추는 시나리오가 2051년 정점, 2069년 고갈이네요다. 보험료율을 15%로 올리고(2025년부터 매년 0.6%포인트 씩 인상) 소득대체율과 수급 시기는 현재의 40%와 65세를 유지하는 방안을 채택하는 경우죠. 하지만 이 시나리오도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아 보입니다.

정부와 국회예산처 재정추계는 모두 연평균 4.5%의 투자수익률이 전제입니다. 수익률이 0.5%포인트 낮아지면 고갈 시기가 1년 빨라지죠. 1%포인트 높아지면 5년이 늦춰집니다. 국민연금의 최근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4.99%입니다.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9.58%, 미국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 7.12%, 노르웨이투자관리청(NBIM) 6.8%, 네덜란드공적연금(ABP) 5.64%, 일본공적연금(GPIF) 5.3% 보다 못하네요.

국민연금 보유자산 가격은 글로벌 경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투자수익률은 경제성장률과 밀접하죠.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향후 5년간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연평균 3% 성장할 것으로 봤습니다. 지난 20년간 5년 단위 연평균 성장률은 3.8%였네다. 얼마전 세계은행(WB)도 2020~2030년 연평균 2.2% 성장을 전망했습니다. 10년 단위 연평균 성장률은 2001~2011년 3.5%, 2011~2021년 2.6%이네다. 모두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였던 지난 30년 보다 현저히 저조한 성장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네요. 국민연금이 10년 평균 4.5% 수익률을 거두기 쉽지 않겠죠?

수익을 높이려면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투자수익률을 높여서 기금 고갈을 늦추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방법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수령 시기를 각각 올리고 낮추고 늘리는 길 뿐일까요. 현재 소득대체율 40%도 40년간 납입을 했을 때가 기준이죠. 대부분 가입자의 납입기간은 이 보다 짧습니다. 실제로는 소득의 20~30% 밖에 안될 가능성이 크죠. 그렇다고 모수(parameter) 개편만 거듭하면 국민들은 70세가 넘어 ‘쥐꼬리’ 연금받겠다고 평생 소득의 10% 이상을 징수당하는 처지가 됩니다.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정부가 생각하는 국민연금 개혁의 근본적인 목적은 기금 고갈 방지일까요 아니면 국민들의 노후 안정일까요.

▶다음세대 ‘연금지옥’ 막으려면…적립금 보존하고 정부 재정지원 이뤄져야

우리나라는 국민연금을 비롯한 사회보험료 부담이 선진국 대비 낮은 편이다. 다만 올리더라도 다른 나라와 제도상 차이점은 분명히 살필 필요가 있다.

연금 고갈을 운운하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 ‘공갈’에 가깝지 않을까 싶네요. 적립된 기금을 헐어서 연금을 지급하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2022년말 국민연금 적립금은 916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43%가 넘습니다. 보험료 수입이 없이 20년간 이상 연금지급이 가능한 세계 최대 수준이죠. 일본과 스웨덴은 약 5년치 연금액인 GDP 대비 33%, 31.8% 수준이구요. 미국은 3년 치로 13.4%에 불과합니다. 올해 국민연금은 45조원 이상의 운용수익을 예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매년 수십 조원의 수익을 내는 적립금을 2041년부터 헐어서 연금재원으로 쓰는 게 과연 옳을까요?

거의 대부분의 선진국이 그 해에 걷은 보험료에 정부 보조금을 합해 연금급여 재원을 마련하는 ‘부과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독일(18.6%), 스웨덴(17.2%), 일본(18.4%) 등이 모두 우리보다 높죠. 덕분에 강제로 내는 사회보험료(노령연금·건강보험·장기요양보험·고용보험) 전체로 비교해도 한국은 18.8%로 독일 39.8%, 스웨덴 26.7%, 일본 29.4% 보다 한참 낮습니다.

선진국 노령연금의 고민은 기금 고갈이 아니라 재원마련입니다. 연금 갈등의 핵심도 정부와 국민이 얼마나 부담을 나눌 지이죠. 독일은 보험료에 정부 보조금(약 24%)을 합해 그 해의 급여 재원을 마련합니다. 국민연금의 모델이 된 일본 후생연금도 2019년 기준 보험료 상한을 18.3%로 정하고 부족한 재원(20.9%)은 정부가 지원하죠. 그럼에도 적립금 운용수익 기여(6.6%)가 적어 소득대체율이 낮습니다. 명목상 50%지만 40년간 ‘외벌이’로 살아오며 보험료를 낸 부부 기준이다. 실제 대부분의 노인가구에서는 50%에 한참 못미친다고 합니다.

국민연금법은 ‘연금급여가 안정적·지속적으로 지급되도록 필요한 시책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고 국가의 책무를 정했습니다. 정부가 국민연금에 돈을 보탤 근거는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정부는 법에 이를 반영하기 주저합니다. 대신 ‘적립금이 고갈되더라도 연금지급이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기금 고갈 후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 지에 대한 계획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부는 대신 부과방식 비용률 추산은 꼬박꼬박하고 있습니다. 기금 고갈 후 연금을 지급하려면 국민들이 보험료를 얼마나 더 내야할지에 대한 추산이죠. 기본가정 기준으로 2060년 29.8%, 2070년이면 33.4%입니다. 국민연금 보험료로만 소득의 30% 이상을 내야한다는 뜻이죠. 정말 이 정도를 내야한다면 대한민국이 바로 ‘연금지옥’일 겁니다.

국민연금이 보유자산을 팔아 자산시장과 금융시스템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면 국민들의 살림도 어려워질 게 뻔하죠. 형편이 어려워지면 소득의 30%가 넘게 될 보험료 부담도 더 커지게 됩니다. 짐이 무거우면 나눠지는 게 합리적이겠죠. 민간이 낸 보험료과 적립금 운용수익,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이 ‘솥의 세 발’을 이루는 구조가 바람직합니다. 2040년부터 운용수익을 제외한 급여 재원의 30%만 정부가 부담해도 2060년대 이후 국민 부담은 18~22% 수준이 될 수 있습니다. 2040년 이전부터 정부 지원이 이뤄진다면 적립금 정점까지 더 늦출 수 있고 그만큼 국민들의 부담도 더 낮출 수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국민연금 제도가 성숙한 선진국들 대부분이 재정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2040년 적립금은 1755조원으로 정점에 도달할 전망입니다. 4% 수익만 내도 연 70조원이죠. 한해 보험료 수입과 맞먹는 규모네요. 이 정도 돈을 벌어들이는 재원을 유지하지 않고 헐어 쓰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요? 재정 투입은 적립금 적자 전환 전에 이뤄져야 합니다. 더 빠르면 더 좋겠죠.

▶재정 건전성 중요하지만…과연 누구를 위한 나라 살림인가

기금 고갈을 방치하면 소득의 30%를 연금 보험료로 내야할 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연금지옥’이다. 적립금을 줄이지 않고 부과방식으로 전환한 후 정부가 연금을 보조하면 국민부담율이 크게 줄일 수 있다.

코로나19 관련 지출로 지난 3년간 재정부담이 커졌다고 합니다. 다행히 지속적인 지출이 아니죠. 재정지출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고령화로 시간이 갈수록 노인 문제가 중요해질 게 뻔합니다.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지는 게 당연하겠죠. 재원마련이 과제입니다. 섣불리 증세를 얘기하기 보다는 우선은 불요불급한 지출과 세제 혜택을 줄이는 방법으로 최대한 재원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금 환급 방식도 고민해볼만 하죠.

2022회계연도 국가부채 2326조원 가운데 정부가 재정을 보전하는 공무원·군인·사학·교직원연금 등의 충당부채가 1181조원으로 절반이 넘는다고 합니다. 국민연금을 다루는 이들 대부분이 공무원연금 수급자인 현실은 아이러니죠. 건전재정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재정의 가장 큰 수혜자아닌가요. 내년에는 총선이 있습니다. 공무원에만 맡기지 말고 정치권이 국민연금 개혁을 철저히 감시해야 합니다. 직역연금도 이번에 함께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가 연금제도를 베껴 온 일본도 이미 직역연금을 후생연금과 통합했습니다.

▶소득비례연금이 해법(?)…국민연금 취지 퇴색, ‘사이비’ 복지될 수도

일각에서는 소득비례연금 도입을 주장합니다. 현재 국민연금은 낸 돈의 2배 이상을 받는 구조죠. 소득재분배 기능도 갖춰 중산층 이하 서민들의 수익비가 더 높습니다. 이를 모두 낸 만큼만 받는 것으로 바꾸자는 주장은 얼핏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치명적 약점이 있죠. 중산층 이하는 기대연급수령액이 현저히 하락하게 됩니다. 소득대체율이 떨어진다는 뜻이죠. 중산층 이상에도 크게 득이 될 게 없어 보입니다. 국민연금 강제 가입의 명분이 ‘낸 것보다 더 받는’ 구조인데 그 매력이 사라진다면 그냥 민간 연금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선진국 가운데 소득비례연금을 도입한 대표적 사례가 스웨덴입니다. 그해 걷은 보험료로 당해 연금 재원을 충당합니다. 근로자는 7%의 보험료를 부담하는데 전액 환급됩니다. 결국 고용주(자영업자 포함)가 50.3%, 정부가 49.2%의 재원을 나눠 부담하는 구조네요. 근로자 입장에서는 낸 만큼만 받는 게 아니라, 사실상 안내고도 받는 셈이구요. 스웨덴이 소득비례연금 도입에 성공한 이유죠. 우리나라는 소득이 낮은 자영업자 비율도 유독 높습니다. 국민연금에서 소득재분배 기능이 사라지면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자영업자의 소득대체율은 더 떨어지게 됩니다.

국민연금과 연계한 감액제도 때문에 국민 노후소득에서 기초연금 비중은 계속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연간 액수도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소득비례연금을 도입한다면 기초연금을 강화해야 소득대체율 하락을 막을 수 있다.

소득비례연금을 도입하면 중산층 이하의 소득대체율 하락을 막을 기초연금 강화가 꼭 이뤄져야 합니다. 기초연금은 100% 국가에서 지급하죠다. 국민연금에 돈을 보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정에는 부담요소입니다. 현재 기준으로 2040년부터는 기초연금에만 최소 40조원 이상의 재정이 필요합니다. 기초연금을 늘리면 재정부담은 이보다 더 커질 게 뻔하죠. 소득비례연금을 도입해도 기금고갈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국회예산정책처 자료를 보면 국민연금을 소득비례 방식으로 바꾸고 보험료율을 12%로 올려도 적립금은 2044년에 적자로 전환되고 2061년에는 고갈됩니다.

초고령화 시대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에 대비가 정말 시급합니다. 정부의 이번 국민연금 제도 손질은 모수 개편을 넘어 구조까지 개혁하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대재앙의 시작이 될 적립금 감소 시점이 18년도 남지 않았으니 근본적인 개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합니다. 적립금이 고갈된다는 공포로 국민들에만 부담만 강요하거나, 세대간 다른 이해를 정치적으로 악용해서는 안됩니다. 정치권과 정부 모두 국민 부담을 줄이고 갈등을 조정하는데에만 주력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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