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대략 20년을 주기로 지폐 디자인을 변경해오고 있다. 여전히 현금결제 비중이 높은 나라이니만큼 위조 방지를 위한 최신 기술을 반영하는 것이 지폐 디자인 개편의 주요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올해 변경되는 지폐에는 세계 최초로 3차원 홀로그램 기술을 도입하여 위조 방지 기능을 강화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폐의 디자인을 변경하는 목적이 위조 방지만은 아닌 것 같다. 잠시 시간을 들여, 현재 사용되는 지폐와 새로 발행되는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둘러보도록 하자.
새 1만 엔권은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교체될 예정이다. 대한제국 시절 일본이 발행한 ‘제일은행권’에도 그려질 만큼 한반도 경제침탈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현재 1만 엔권에는 근대 일본의 계몽 운동가이자 메이지 유신의 주역 중 한 사람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려져 있다. 1984년 개편부터 등장하여 2004년 개편 때에도 유일하게 계속 남아 있다가 이번 개편으로 퇴장한다. 김옥균이나 서재필 같은 개화파들의 스승이 되어 갑신정변에도 개입했던 관계로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나중에는 정한론을 주장하며 제국주의 일본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의 학문적 출발점이 이공계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가 포술을 배우기 위해 진학한 ‘데키주쿠’(오사카 대학의 전신)는 당시 서양 과학 중심의 네덜란드 학문인 ‘난학’을 가르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5천 엔권에 그려진 히구치 이치요라는 여성 소설가는 우리나라 5만 원권의 신사임당처럼 일본 화폐에서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이다. 2004년에 화폐 디자인을 변경하면서 일본 최초의 여성 모델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번 새 5천 엔권에서도 역시 여성이 모델로 발탁되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현모양처 상을 거부하고 여성 고등교육에 앞장선 쓰다 우메코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1871년 만 6세의 나이에 미국 사절단에 동행하여 현지에서 초중등 교육을 이수하였다고 한다. 잠시 귀국하여 귀족 가문의 딸들을 교육하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889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생물학을 전공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일본 최초의 이공계 여성인 셈이다.
지금 통용되는 1천 엔권에는 장애를 극복한 의사이자 세균학자인 노구치 히데요 박사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2004년 이전까지 문과 일색이던 화폐 도안에 처음으로 이공계를 대표해서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 결과는 오류가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연구 과정에서 미성년자에게 매독균을 주입하는 일종의 생체실험을 자행하는 등 윤리적인 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새 1천 엔권에서는 노구치 박사의 스승인 기타자토 시바사부로의 초상으로 교체될 예정이다. 그는 의사이자 세균학자로서 ‘일본 근대 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독일 유학 중 파상풍 치료법을 개발한 공로로 제1회 노벨 생리학상 수상 후보자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일본 최초의 노벨과학상 후보자였다.
일본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새로운 지폐 모델은 일본 국민이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정도의 탁월한 업적과 높은 지명도를 갖는 메이지 시대 이래의 ‘문화인’이라는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새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에서,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고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가 엿보인다.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산업, 여성, 과학기술’로 요약한 선정인 셈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총 4종의 지폐를 사용하고 있다. 어느 일간지 기자가 기사화한 바와 같이 지폐에 등장하는 모델 모두가 조선왕조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 관계자’라는 특징이 있다. 1천 원권 모델인 퇴계 이황은 성균관을 졸업하고 성균관 교장에 해당하는 대사성을 역임했다. 5천 원권의 모델인 율곡 이이도 성균관 졸업생이다. 1만 원권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은 성균관의 재단 이사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5만 원권의 모델인 신사임당은 율곡 이이를 성균관에 진학시켰으니 성균관 학부모라는 논리다. 이웃 나라인 일본과 다르게 우리나라의 지폐 모델은 모두 조선 시대 사람이고, 성리학을 공부한 문인 남성이거나 현모양처다.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초등학생의 희망 직업 1순위는 운동선수이고 2위가 의사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상위권에 있었던 과학자를 이제는 순위권 안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최근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삭감 이후, 유능한 젊은이들이 연구자의 삶을 외면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사회적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지폐 도안에서 보이듯이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어떤 인물을 기억하고 누구를 존경해야 할지 암묵적인 합의를 이룬듯하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성균관 스캔들’이라고 정했다. 요즘 어린이들이 보기에 과학기술자가 닮고 싶고 존경할만한 중요한 존재로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성균관 스캔들’에서부터 찾는다면 지나친 자학일까?
한성태 한국전기연구원 전기응용연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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