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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팝이라는 단어 생겨 놀라웠는데, 이젠 기대되는 산업 됐다” [헤경이 만난 사람-이성수 SM엔터 CAO·KMR 대표]
이성수 SM엔터테인먼트 CAO·KMR 대표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작곡을 전공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고, 대중음악 황금기에 성장한 덕에 자연스럽게 가요와 팝에 눈을 떴다. 드뷔시의 ‘달빛’을 감미롭게 연주하고, 샤이니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내가 사랑했던 이름’을 쓴 작곡가. K-팝 전성기를 이끈 이성수 SM엔터테인먼트 CAO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SM에 인턴 사원으로 첫 출근을 하던 해다.

그룹 신화가 데뷔했고,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 등 4대 PC통신을 통해 팬덤이 커졌던 그 때 인턴 이성수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신화창조(신화 팬덤) 동향 파악’이었다. 그때 그에게 대중음악에 대한 본격적인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당시 H.O.T에서 만들어진 팬덤의 문화를 비즈니스와 접목하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며 “이때 음악 비즈니스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군대에 다녀온 후 SM에 정식 입사한 시기는 2005년 8월. A&R 담당으로 대중음악 산업에 첫 발을 디딘 후 “음악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음악하는 사람들과 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음악 공부도 했다.

이 CAO는 “입사 초기 스스로 작곡과 컴퓨터 음악을 공부했고, 새벽까지 음악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다”며 “이후 (음악 산업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A&R에 집중하면서 창작보다는 일상의 위안 정도로만 피아노를 친다”며 웃었다.

지난 2009년 A&R 팀장으로 승진한 그는 K-팝의 황금기를 맞았다. SM 특유의 색을 담은 음악이 쏟아지며 이 CAO 역시 최고의 성취를 이뤘다. 동방신기, 보아, 소녀시대, 샤이니, 슈퍼주니어, f(x) 등이 한국 대중음악계를 호령했고, SM은 동아시아를 넘어 유럽, 미국 시장을 개척했다. 그 중심에 이 CAO가 있었다.

이 CAO는 지난 20년을 돌아보며 가장 놀라운 건 ‘K-팝’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라 말한다. 그는 “2009~2010년 즈음 K-팝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많이 쓰이게 됐던 것 같다”며 “처음엔 단어 자체가 어색했는데,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K-팝이 퍼지며 고유 명사가 됐다”고 되돌아봤다.

실제로 SM은 지난 2009년 업계 최초로 자사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그는 “K-팝을 만드는 필수 요소인 음악, 퍼포먼스, 스타일링 등 ‘굿-룩킹(good-looking)’한 종합 콘텐츠를 알리기 위해 채널을 열었다”며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K-팝도 확산됐다”고 봤다.

그는 “15년 전이었던 2010년에도 지금처럼 ‘K-팝이 언제까지 갈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다”며 “그 때는 ‘원히트 원더(One Hit Wonder, 한 곡만 크게 히트시킨 아티스트)’같은 비관론에서 비롯됐지만 지금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제는 한 기업의 성과가 아니라 K-팝 전체가 산업으로 함께 성장, 진화하는 때”라며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산업”이라고 덧붙였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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