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거판 흔든 양파, 대파
2023년 11월 세계 최대 양파 수출국인 인도는 양파 수출을 ‘2024년 3월까지 금지한다’고 밝혔다. 이상 기후, 잦은 홍수 등으로 양파 가격이 일 년 전에 비해 두 배나 뛰어오르자 인도는 몇 달 뒤 열릴 총선을 앞두고 이같은 조치를 취했다. 밀, 쌀, 설탕에 이은 수출 규제 조치였다.
올해 4월 총선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인도 정부는 수출 금지 시한을 ‘3월 이후로 무기한 연장’한다고 밝혔다. 수 만 명의 농민들이 트랙터 시위에 나서는 등 높은 물가에 시달린 민심이 날씨 만큼이나 험악해지자 취한 조치다. 2023년 기준, 인도 인구의 6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자 바로 부작용이 터져나왔다. 인도 안에 꽁꽁 묶인 양파는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등 주변국의 물가를 자극했다. 방글라데시 언론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인도 정부가 처음 수출을 금지하자 양파 가격(수도 다카 기준)이 130타카(약 1540원)에서 200타카로 올랐다. 방글라데시 뿐만 아니라 네팔,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등과 인도 사이에 양파는 이제 ‘외교 사안’이 됐다.
양파 앞에는 쌀이 있었다. 인도 정부가 2023년 7월 20일 바스마티(Basmati) 품종 이외의 쌀 수출을 금지하자 즉각 세계 식량 안보에 대한 우려가 터져나왔다. 세계 1위의 쌀 수출국이기도 한 인도에 의존해온 국가들,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우 인도산 쌀의 시장 점유율이 80% 이상이기 때문이다. 쌀 소비량이 많은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등 일부 국가의 경우 국민이 섭취하는 하루 총 칼로리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이 40~67%에 이른다.
한국에서도 4월 총선을 앞두고 대파 가격이 연일 이슈가 됐고 ‘대파 한단 875원’ 논란을 지켜보던 일부 유권자들은 대파를 들고 집회 현장에 나가기도 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지난 3월 평균 흙대파 가격은 5565원으로 생필품 중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채소류 20개 상품 가운데 9개 가격이 올랐고 특히 흙대파(500∼800g)의 평균 판매가는 작년 3월 가격(3666원)보다 51.8%나 상승했다. 애호박은 27.4%, 적상추는 10.7% 상승하는 등 먹거리 가격이 크게 흔들렸다. 사실 대파 가격 문제는 몇 년 전에도 나온 얘기다. 2020년 겨울 한파 등 이상기후에 따른 작황 부진으로 대파 가격이 급격히 오르자 당시 ‘금파’로 불렸다. 최근 채소류 가격 상승 원인인 잦은 폭우나 한파 등으로 인한 일조량 부족과, 습기로 인한 보관 및 유통의 어려움 등이다.
요즘 누군가는 밥보다 자주 찾는다는 커피 가격도 문제다. 참고로, 우리나라 성인 한 명이 2023년 한해 소비한 커피는 400잔이 넘었다. 최근 로이터통신은 올해 베트남 커피 재배자들이 10년 만에 최악의 가뭄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향후 수확 전망도 좋지 않아 전 세계적으로 커피 가격 상승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6월 커피 원두 국제가격은 로부스타의 경우 ㎏당 3.67달러, 아라비카의 경우 파운드당 2.01달러를 기록했다. 전년 같은 달과 비교하면 각각 40.6%, 7.5% 올랐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원두 가격 상승은 집 앞 카페 사장님들이 가장 잘 안다.
지극히 일부 사례들이다. 베트남 커피부터 서아프리카의 코코아, 남유럽의 올리브, 브라질의 오렌지에 이르기까지 기후 변화로 인한 영구적인 기상 패턴의 변화는 작물 수확량을 감소시키고 공급을 압박하며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 국립공원을 찾은 한 방문자가지난 7일 화씨 131도, 섭씨 55도를 가리키는 온도계를 쳐다보고 있다. [AFP] |
#. 사과 1만원? 이제 시작이다.
당장 한국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국내 보도에 따르면 식료품·음료 등 우리나라의 먹거리 물가 상승률이 주요 선진국 평균 수준을 약 2년 만에 다시 추월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물가는 고공행진 했지만 이후 주요국의 식품 물가는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돌아온 데 반해 한국의 경우 여전히 과일·채소 중심으로 고물가가 계속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월 한국의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물가 상승률은 6.95%로 OECD 평균(5.32%)보다 높았다. 특히 식료품·비주류음료의 경우 통계가 집계된 35개 회원국 가운데 튀르키예(71.12%), 아이슬란드(7.52%)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다.
쌓아놓고 먹던(?) 사과 한 개가 1만원에 육박하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던 지난 3월, 사과 가격 상승률은 88.2%였다.
문제는 이게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상기후로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채소, 과일 등 신선식품 가격이 급등하고 있고 그 원인은 주지하다시피 기후 변화와 이로 인한 작황 부진이다. 지난 3월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기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향후 10년 동안 식품 인플레이션이 연간 3%포인트씩 증가할 수 있다. 또한 독일 포츠담 기후영향연구소와 유럽중앙은행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2035년까지 기온 상승으로 인해 매년 전 세계 식품 가격이 0.9~3.2%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며칠 전 한국은행도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7월 2일 ‘BOK이슈노트:기후변화가 국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폭염 여파에 일시적으로 기온이 섭씨(℃) 1도 오르면 농산물 가격은 0.4~0.5%포인트 높아진다. 온난화 영향으로 월 평균기온이 장기평균보다 1도 높은 상황이 1년 지속된다면 농산물 가격은 2%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보고서를 작성한 조병수 차장(조사국 물가연구팀)은 “농산물을 제외한 공업제품이나 서비스 등 다른 품목은 이상저온, 한파와 같은 일시적 기온하락 충격에 유의하게 반응하지 않았다”며 “농산물가격은 다른 품목에 비해 기온의 상승이나 하락에 상관없이 전반적인 기상 여건 변화에 따라 높은 변동성을 나타냈다”고 지적했다.
쌀, 양파, 대파, 사과, 오렌지, 커피 등 먹거리 가격이 급상승하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고민도 함께 깊어지고 있다. 중앙은행의 존재 이유는 바로 ‘물가 잡기’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식품의 가격 변동은 때때로 찾아오는 불청객, 즉 일시적 현상으로 이해됐지만 이제는 디폴트다.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 인플레이션은 다른 물가에도 영향을 미치고 이는 임금 상승으로 이어진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보도에서 “기후 변화가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을 유발하기 시작하면서 금리 결정자들이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해당 매체가 인용한 런던정경대 그랜덤 기후변화 및 환경연구소의 데이비드 바메스 연구원은 식량 인플레이션의 급등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가격 충격이 반복되고 빈번해져 소비자 물가에 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경우 더 이상 유용한 접근 방식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HSBC의 프레데릭 노이먼(수석 아시아 이코노미스트)은 식량 공급이 더 자주 중단되면 “중앙은행이 대응하게 돼 금리의 변동성이 커지게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금리가 더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인도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한 라구람 라잔은 특히 개발도상국의 중앙은행의 경우 “(개발도상국) 예산의 큰 부분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추세이자 더 큰 변동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식량 가격에 더욱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똑같이 식탁 물가가 오르더라도 개도국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일부 전문가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 가격 변동성이 커질 것이라는 데 동의하면서, 중앙은행들은 물가가 상승하는 시기에 금리 인상을 고민해야 하지만 다른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아르헨티나의 한 시민이 지난달 13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식료품점 앞을 지나가고 있다. 경제 위기에 빠진 아르헨티나의 5월 물가상승률은 4.2%로 2년반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높은 물가에 국민들은 신음하고 있다. [AFP] |
#. 개도국들 더 큰 영향
무슨 일이든 나쁜 일의 여파는 대체로 약자들에게 더 고약하다. 저위도에 위치한 개발도상국들은 기후 변화에 더 취약하고 이는 곧장 식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개도국들은 선진국들에 비해 식품 가격에 더욱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데다, 여전히 농업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농민들의 생산성 감소는 곧 소득 감소를 의미한다. 특히 부족한 인프라는 이상 기후 대응력에 명확한 한계를 노출하게 된다.
반면, 선진국은 기술과 자원을 활용해서 어떻게든 기후 변화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개도국은 처지가 다르다. 선진국들은 여러 국가에서 식품을 수입하면서 변동성을 분산시킬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식량 안보 문제에 근본적인 대비가 필요하다고 경고해왔다. 블룸버그는 지난 1월, 2024년 기후 전망을 내놓으며 허리케인이 올해 가장 활발할 수 있고, 엘니뇨 현상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높아지면서 식량 시스템에 더 많은 기후 자금이 지원돼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지난 5~6월, 여름이 채 오기도 전에 이미 푹푹 찌는 날씨의 연속이었다. 올해는 또 어떤 기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두렵다. 전세계 양파, 대파, 사과, 쌀 가격은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을 몸살나게 할 것이다. 물론 일반 국민들은 진작에 몸살 난 상태다.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은 20% 수준이다. 2022년 세계식량안보지수(GFSI) 조사에서 한국은 ‘식량안보 및 관련 정책 이행력’ 지표에서 0점을 받았다. GFSI 총점도 39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이었다. ‘우리는 과연 준비가 돼 있는걸까?’라는 질문조차 민망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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