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 할래요?’…“미션 같은 대사였다”
“욕심 내려놓은 지금 가족이 가장 큰 행복”
드라마 ‘화인가 스캔들’의 김하늘 정지훈 [디즈니+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대사는 짧고 직설적이었다. 억양 없는 말투, 낮은 음성으로 한 마디를 밀어 넣듯 던진다. “왜 이렇게 사는 겁니까.” 대사보다는 대사 사이의 정적, 말보다는 눈빛으로 서사를 쌓는다. 그 와중에 ‘희대의 명대사’가 나왔다. “내 여자 할래요?” 소위 ‘돈 좀 쓴’ 막장 불륜 드라마로 불린 디즈니+의 ‘화인가 스캔들’이다.
“김하늘 선배와 대사를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세 가지가 있었어요. ‘오늘 나랑 잘래?’, ‘내 여자 할래요?’, ‘당신이 내 남자예요’라는 대사였죠. 저희에겐 미션과 같았어요.”
드라마 공개 이후엔 매회차 열띤(?) 반응이 나왔다. K-드라마에 한 획을 그을 ‘직설 화법’ 대사는 세련된 ‘티키타카’에 익숙해진 깐깐한 시청자들로부터 “손발이 오글거린다”는 공격을 받았다.
드라마를 마치고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지훈(비·42)은 “대사를 바꿔볼까 고민도 했지만, 작가님이 쓰신 것을 최대한 존중해 표현했다”며 “연기에서의 눈빛과 시선 처리에 중점을 두고 좀 더 멋있고 자극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화인가 스캔들’은 재벌 그룹 화인의 며느리이자 전직 골프선수인 오완수(김하늘 분)와 그를 지키는 경호원 서도윤(정지훈 분)을 중심으로 의문의 사건을 추적하는 드라마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며느리와 재벌가 시어머니의 갈등, 불륜과 살해 위협 등 소위 ‘매운 맛’과 ‘클리셰’로 뒤범벅된 스토리였다.
이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는 확고했다. 정지훈은 “이전에는 주로 코믹한 모습이 섞인 캐릭터가 많았는데, 서도윤은 여태껏 해온 캐릭터와 상반되는 느낌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화인가 스캔들’은 도파민이 치솟는 자극적인 스토리와 빠른 전개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붙잡았다. 여기에 재벌가 며느리와 경호원의 미묘한 감정까지 얹어지니 ‘마라맛 드라마’의 요건은 모두 갖추게 됐다. 정지훈은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도윤과 완수는 서로 끌리되 선을 넘지 말아야 하고, 로맨스의 달달함을 표현해서도 안되는 관계”라며 “둘의 미묘함은 불륜이 아닌 일탈”이라고 했다.
변신은 성공했고, 반응도 좋았다. 엇갈린 평가와는 별개로 드라마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시청 순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 집계 결과, 한국을 비롯해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4개국에서 디즈니+ TV쇼 부문 1위(7월 26일 기준)에 올랐다. 정지훈은 “많은 반응이 있었겠지만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며 “주변에서 ‘화인가 스캔들’ 잘 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며 사람 좋게 웃었다.
가수 겸 배우 정지훈 [디즈니+ 제공] |
“예전엔 순위와 흥행에 연연했는데 지금은 제가 무대에 설 수 있고,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요. 각종 차트에서 드라마가 1위를 했다는 성적이 나왔으니 여러 반응에 반론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됐고요. 이 정도면 성공한 거 아닌가요? (웃음)”
정지훈은 일종의 ‘아이콘’이다. 그는 가수로도 배우로도 활동하며 굵직한 행보를 이어왔다. 2002년 ‘나쁜 남자’를 통해 가수로 데뷔, 등장과 함께 센세이션을 불러왔다. 아이돌 전성시대에 나타나 ‘태양을 피하는 방법’, ‘레이니즘’, ‘널 붙잡을 노래’ 등 연이어 메가 히트곡을 내며 원톱 솔로가수 시대를 열었다. 드라마 ‘상두야 학교 가자’(2003)로 연기를 병행하며 배우로도 의미있는 결실을 거뒀다. 할리우드 영화 ‘스피드 레이서’, ‘닌자 어쌔신’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는 “전에는 무조건 잘 되고 싶고 욕심이 많았다”며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바라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억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노래를 냈는데 1위를 못 하면 자다가 공황 발작이 올 정도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스스로의 이야기처럼 그는 ‘독기의 상징’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서질 듯 춤을 추며 노래했고, 음악·연기·예능을 가리지 않고 온 힘을 쏟았다. 그 치열함으로 최정상에 올랐고, 이후 긴 시간 동안 서서히 ‘내려놓음’의 수양을 거쳤다.
“20여년 활동하며 제가 느낀 것은 목표를 세워도 목표를 이룰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 모든 타이밍과 순간이 잘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독하게 달려들어 무언가를 할수록 스스로 제 목을 조르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는 2005년 미국에서 워쇼스키 감독의 ‘스피드 레이서’ 현지 오디션을 본 이후 할리우드에도 입성했다. 연이어 ‘닌자 어쌔신’의 메인 타이틀을 따냈던 그 시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는 “‘이제 됐다, 모두 다 가졌다’는 생각도 했다”며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을 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했다.
군입대 전이었던 그는 최소 3개월에 한 번씩 한국을 오가며 영화 촬영을 병행했다. 하지만 ‘군미필자 한국인’라는 특수성으로 그의 활동 보폭이 점차 좁아졌다.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었지만, 다음 스텝까지 원만히 이어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날들을 보내며 30대 중후반쯤이 돼서야 조금 편안해졌어요. 요즘엔 과거에 제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좋은 날일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드라마나 영화가 잘 되는 게 내가 정말 원하는 행복일까 묻게 되더라고요. 제가 내린 결론은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거예요.”
가수 겸 배우 정지훈 [디즈니+ 제공] |
확고한 행복을 찾아내자 일상은 감사의 마음으로 채워진다. 그는 “지난 오랜 시간 잘 버텨온 것 같다. 지금 이렇게 일할 수 있어 무척 감사하다”고 했다. “특히 K-팝에 있어선 어떤 하나의 선을 그었고,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과장도 허세도 아니다. 그는 한국 솔로가수 최초로 월드투어(2006)를 진행했고, 도쿄돔(2007) 무대에도 서며 매순간 기록을 차곡차곡 써내려간 장본인이다.
정지훈의 나침반은 가족과의 행복으로 향해있다. ‘독기’를 내려놓은 그에겐 여유가 더해졌다. 드라마를 마친 그는 곧 가수로 돌아올 예정이다.
“결혼 후엔 훨씬 안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저의 첫 번째 목표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 목표는 해낼 수 있는 선에서 제 모습을 보여드리는 거예요.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능력 있는 후배들이 많으니, 욕심 부리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해나갈 거예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