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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은님 "그 끝없는 절망감에.. 붉은 새를 끌어안은 나"
#그림을 낚는 강태공... 나는 화가가 되고자 했던 사람은 아니다. 포천군 면사무소에서 결핵관리요원으로 일하던 어느 날 ‘파독간호보조원 모집공고’를 보고 1970년 독일로 떠나 외로움을 달래려고 그렸던 그림이 우연히 알려지는 바람에 작가가 됐다. 병원측 주선으로 전시를 했고, 함부르크 국립대에 입학해 6년간 밤에는 간호조무사로, 낮에는 학업을 했다.

어느 때부턴가 나를 두고 ’팔자가 세다’는 사람 보다, ‘부럽다’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나의 자유가 부럽고, 돈을 잘 버는 게 부럽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 큰 벌을 받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살았었다. 괴롭게, 마음 편치않게 지내야 했던 시간이 많았던 것이다. 그 시간을 겪은 뒤에야 나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나는 화가이지만 한편으론 온종일 낚싯대를 던져놓고 큰 고기가 물리길 바라는 강태공이기도 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낚시꾼처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채 종종 마음이 조급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정열적인 여자라 뭐든지 죽어라 사랑하고, 죽어라 아파하고, 죽어라 팔팔거린다. 붙잡힌 물고기처럼 팔딱거린다. 아직도 힘이 남아도는 탓이리라. 이제 남은 숙제는 조용해지는 것. 그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 세상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조화와 질서 속에 있는 것이기에.. 

빨간 새와 함께
#내 고향은 예술... 내 고향은 예술이다. 나는 그 속에서 지치도록 일하고 펄펄 뛰며 조용히 쉴 수 있다. 예술은 나를 그냥 그대로 다 받아준다. 나는 그림 속에서 마음대로 뛰노는 재미에 팔려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며 장난을 해야 ‘사는 맛’이 난다.

죽는 날까지 그림을 통해 미련없이 모든 걸 태우며 살고 싶다. 내 고집까지 다 태워버리고 싶다. 덤으로 태어난 인생이고, 엉터이로 살고 갈망정 이 인생에 감사드리고 이 인생을 사랑하다가 내가 죽으면 그 나무 아래 어딘가에 ’공짜로 살다 감’이라고 써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큰 바위가 되고 싶다.. 나는 언제나 혼자 떠돌아다니는 구름이었다.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내 마음대로 느끼고, 내 마음대로 훌쩍거리며 살았다. 어렸을 때도 그렇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렇다. 이제 육십 중반인데도 마음은 항상 사춘기다. 이놈의 철이 아직도 안난다. 언젠가 바다의 큰 바위가 되어 파도가 쳐도 끄떡하지 않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다.

산보
#당신 인디언이죠?...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꽁꽁 얼어붙던 추운 날, 독일서 지하철을 탄 적이 있다. 나를 보고 독일인 할머니가 물었다. "당신은 인디언이지요?" 나는 "아니요, 한국인이에요"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네 옆집 사는 여자가 얼굴이 꼭 나처럼 생겼는데 볼리비아에서 온 인디언이란다. 그리곤 옆자리 승객들에게까지 묻는다. 이 여자가 인디언인지, 한국인인지 맞춰보라는 것이다.

사람들 모두 이구동성으로 나를 인디언이라고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민주적이라는 게 때론 이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두꺼비 같은 내 얼굴...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젊은 시절 결핵관리요원으로 취직돼 첫 출근을 할 때 직원들은 서류에 적힌 내 이름을 보고 모두들 ‘코스모스처럼 가냘픈 서울 아가씨’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웬 두꺼비 같은 여자가 나타나 모두 실망했다는데 나는 그래도 내 생김새를 한번도 탓해 본 적이 없다. 두꺼비 같은 얼굴, 작은 키, 뚱뚱한 몸, 작은 손과 발을 가진 나. 나는 누구일까? 내 마음은 어디에서 나와 함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내 마음이 어떻든, 나는 우주의 일부이고, 내 마음 또한 우주의 일부라는 것이다.

깊은 바다
돌이켜보면 내 안에는 늘 서로 다른 두사람이 살아왔던 것 같다. 감정적인 사람과 이성적인 사람. 이 두사람이 사이좋게 지내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디 이 둘 뿐이었을까? 욕심 많은 사람, 싫어하는 것이 많은 사람, 뭔가 주고 싶은 마음씨 좋은 사람, 보채고 칭얼대는 어린아이, 때론 살기가 싫어서 아우성치는 사람도 그 안에 살고 있다.

#자유로운 화가... 이것은 아무리 들어도 부러운 말이다. 예술은 진실과 통하는 것으로, 쉽게 손대고 쉽게 빠져 나오고 하는 그런 장난감이 아니다. 참다운 예술은 진정한 순수함을 원한다. 모든 복잡함이나 기술을 떠나, 단순함이 남아 있을 때 예술은 살아난다. < 글,그림=노은님(화가) >

▶재독(在獨)화가 노은님(65, Eun Niim Ro)은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14살에 서울로 이사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과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9개월 과정의 간호보조교육을 받고 포천군 면사무소에서 결핵관리요원으로 지냈다. 25세가 되던 해 파독 간호보조원 모집공고를 보고 독일로 떠났다. 2년 뒤인 1972년 독감으로 결근하는 바람에 병문안왔던 간호장이 그의 방에 가득 쌓인 그림들을 보게 됐고, ‘여가를 위한 그림’이란 제목으로 병원 회의실에서 첫 전시회를 열어 주었다.

이 전시 작품들이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한스 티만(파울 클레의 제자) 교수의 눈에 띄어 이듬해 국립조형예술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6년 동안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미술학도로 생활한 그는 1980년부터 화가로의 길을 걷게 된다.

1986년 노은님은 백남준의 주선으로 백남준, 요셉 보이스 등 세기의 거장들과 함께 ‘평화를 위한 전시’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때 백남준이 한국 화랑 주인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에 노은님이라고 그림 잘 그리는 여자가 있다”고 소문을 냈고, 점차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물고기, 나비, 사람, 하늘, 새 등의 자연물을 단순하게 그리는 노은님의 그림에는 밝은 생명의 기운이 가득 담겨 있다. 천진하고 소박하며 진실하다. 유럽에서는 그를 일컬어 "동양의 명상과 독일의 표현주의가 만나는 다리" 또는 "그림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독일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많은 상을 받았고,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꾸준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부터 최근까지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던 노은님은 Pentiment여름학교 학장도 역임했다. 56세가 되던 지난 2002년, 세살 연상의 같은 학교 게르하르드 바취(Gerhard Bartsch) 교수와 결혼했다. 현재 독일 함부르크와 미헬슈타트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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