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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거대한 우주에서 길 찾기

[류이치 사카모토, ’플레잉 더 피아노(Playing the Piano) KOREA 2011’]

그 곳엔 두 대의 피아노가 있고,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까만 어둠 속에서도 선연하다. 개울소리에 덧대여지는 것은 우주의 신호다. 고막 속을 깊이 자극할 만큼 날카롭지는 않다. 그 위엔 피아노가 흐르기 때문이다.

어느새 은발이 된 이 뮤지션은 지난 2000년 이후 11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그 때와 같은 장소에 선 류이치 사카모토는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검은 수트에 흰 셔츠를 입고 두 대의 피아노 중 하나에 앉았다. 아직은 객석의 귀에는 익숙치 않은 네 곡을 연주했다. 사카모토의 아방가르드한 음악세계가 단 네 곡 안에서, 사카모토 머리 위로 쏟아지는 노오란 핀 조명에 묻어났다.

네 곡의 연주를 마친 뒤 사카모토는 한국팬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류이치 사카모토입니다. 지금까지 들으신 곡은 가장 최근 발매된 ‘anger’에 수록된 곡입니다. 지금부터는 여러 가지 곡을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한국말이었다. 국내를 찾는 어떤 일본 뮤지션보다 더 정확한 한국어로 이 겸손한 거장은 이처럼 말했다. 무대 위의 고독한 뮤지션의 열기에 짓눌린 객석에서도 함성이 곳곳에서 새어나왔다. 사카모토는 다시 피아노에 앉는다.

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4시와 8시, 두 차례에 걸쳐 류이치 사카모토의 라이브 공연이 진행됐다. 공연과 더불어 온라인 ustream을 통해서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었다. 4시의 공연을 본 관객에게 레퍼토리도 약간 다른 8시 공연을 실시간으로 다시 보는 것은 ‘선물’이기도 했으나 다소 짧았던 4시 공연과 달리 서울에서의 마지막 겨울 저녁을 더 오래 달군 8시의 공연을 다시 보고 있자면 괜한 ‘시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국내에도 골수팬들이 많다. 그의 음악을 깊이 접한 팬들이 아니라면 류이치 사카모토를 영화음악 감독이나 뉴에이지 작곡가로 알 수도 있지만 어떠한 단어로도 그를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는 그의 2009년 앨범의 타이틀이기도 한 'Playing the piano'라는 제목이 붙은 서울 공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니 그에 대해서는 ‘전방위 뮤지션’ 정도로 소개하고 다시 그의 공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멋진 피아니스트의 한국말 인사 뒤에 이어진 곡은 ‘A flower is not a flower’다. 중국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백거이의 한시 '화비화'를 읽은 뒤 만든 이 곡은 이번 공연에서도 여전히 비장미가 감돌았다. 그 뒤를 이어 담담하고 맑은, 하지만 짙은 커피같은 보컬은 사라진 ‘Tango’가 연주되며 고독한 연주자의 여행은 시작됐다. 


젊어서의 그는 일부러 회색으로 탈색도 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변해간 색이었다. 세월이 쌓이는 사카모토의 시간에 더해지는 것은 피아노의 깊이다. 만일 사카모토가 우주라면 그의 피아노는 아마도 사카모토가 가장 사랑하는 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 뮤지션에게 영역은 없다. 그의 어떤 곡들은 단지 피아노라는 악기 하나로 연주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무대에 두 대의 피아노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다. 야마하가 개발한 ‘디스클라비어’ 시스템을 통해 사카모토는 두 대의 피아노 연주가 가능해졌다. 

비어있는 의자가 주인공인 반대편의 피아노에는 그가 프로그래밍한 음악들이 흘어나온다. 피아노의 선율에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더해지고, 건반악기에서 현의 소리가 흐른다. 거기에 바람소리가 더해진다. 그것은 사카모토라는 우주가 사랑한 또 하나의 별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조율하는 이 우주적 뮤지션은 이 곳에서 존재하다가 부재했다. 이어지는 세 곡의 영화 음악, ‘하이힐 메인테마’ ‘Merry christmas mr.lawrence’ ‘The last Emperor’에서는 소박한 피아노와 격정적인 피아노의 절정을 느낄 수 있다. 특히 ‘하이힐’의 메인테마에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영화의 이미지가 덧대어진다. 70년대 미국과 광기어린 붉은색의 ‘샤넬’과 하이힐이 영화 곳곳에 묻어났듯 사카모토 뒤로 펼쳐진 붉은 영상은 이 피아노 위로 음울하고 장엄한 슬픔을 던져놓았다.

사카모토의 우주에서 길을 잃어갈 무렵 이 전방위 뮤지션은 갑자기 관객을 달랜다. 길을 찾지 못하고 눈물 고인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의 음악은 관객을 어느새 지상으로 내려놓는다. 그곳은 ’It‘s reality’. 이제 좀더 비트를 얹는다. 그의 첫 솔로곡이었던 ’Thousand knives‘와 ’Tibetan dance‘다. 누구보다 환경문제에도 관심이 많던 그는 음악으로 말하고 영상을 통해 한 번 더 말한다. ’우리는 한 행성 안에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이 때에도 사카모토의 단골 제스쳐는 계속 된다. 음의 속도와 멈춤에 따라 그의 어깨는 더 깊이 들여올려진다. 감은 눈과 굳게 닫은 입술, 물 위를 흐르는 듯한 그의 손가락은 끝도 모를 춤을 춘다. 


박수는 콘서트홀이 떠나갈 듯하다. 다시 나와 설핏 웃으며 사카모토는 스페셜 게스트를 소개한다. 객석의 청중들은 어느새 놀이터로 내려온다. 마지막 무대의 스페셜 게스트, 10년 전에는 이 사람이 그의 공연에 서리라는 상상도 못했다. 사카모토 교수의 간택을 받은 자, MC 스나이퍼다. 예술의 전당에 선 랩퍼와 류이치 사카모토의 인연은 ’The sheltering sky‘가 시작이다. 그의 2집 앨범 수록곡 ’baby don‘t cry’에서 이 곡을 샘플링하고 싶다고 사카모토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을 계기로 2004년 ‘undercooled’의 랩 피쳐링을 하게 됐다. 이 곡을 마지막으로 사카모토는 10년 만에 찾은 서울 무대를 끝냈다. 

8시 공연의 마지막 곡은 ’Aqua’였다. 그 때 사카모토의 피아노에는 겨울 달빛이 내는 소리의 고요함이 담겨졌다. 마지막에 어울리는 곡이었다. 다시 찾은 한국에서의 공연은 굿바이였기 때문이다. 서울공연을 모두 끝마친 사카모토의 모습은 온라인에서 계속 볼 수 있었다. 그는 샴페인을 마시며 무대 뒤에서 박수를 쳤고, 그 뒤 한식당에서 맥주와 함께 늦은 저녁을 했다. 팬들은 그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봤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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