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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T보안의 풍운아 권석철 대표, “내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
때로는 인터뷰이보다 먼처 도착하는 게 작지만 소중한 행운을 안겨줄 때가 있다. 

특히 인터뷰이가 쓰는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다면 금상첨화다. 적어도 인터뷰 할 이 사람이 요즘 무엇에 관심 있고, 즐겨 읽는 책은 무엇이며, 물건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정돈파인지 제멋대로 던져 놓고 필요할 때 꺼내 보는 자유분방파인지 미리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오후 3시 약속시간에 맞춰 권석철(42) 큐브피아 대표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주저 없이, 혼자 쓰기엔 다소 넓은 33㎡(10평) 남짓한 사무실 구경에 들어갔다.

하지만 혼돈이 급습했다. 듬성듬성한 책장에는 IT를 비롯해 정치, 사회, 경제, 교육 서적 등 전분야를 망라한 책들이 불규칙하게 꽂혀 있었다. 마치 그날 기분대로 뽑아 읽는 사람의 책장 같았다.

책상 위는 더욱 난해했다. 커다란 데스크탑 컴퓨터에 갖가지 서류 뭉치들, 어떤 의미로 정리됐는지 가늠할 수 없는 명함들, 그리고 조화를 찾아볼 수 없는 다크초콜릿과 전통떡. 여기에 책상 옆에 높인 박스들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삿짐처럼 놓여 있었다.

권 대표가 6층 사무실로 올라오는 동안 사무실을 나름 쭉 훑어 본 첫인상은 “이사람 정말 괴짜구나”였다. 순간 인터뷰가 산으로 가다 ‘이 산이 아닌가’하는 순간이 오지나 않을까 노파심이 들었다.

▶“사람들이 저보고 이상하고 엉뚱하대요. 근데 그거 맞아요”= 권 대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190㎝는 되보이는 훤칠한 키가 눈에 들어왔다. 이어 앙상한 팔 다리, 가냘픈 어깨가 보였다. 그런 그가 허리를 심하게 숙이며 악수를 건냈다. 키에 비해 작지만 하얗고 긴 소가락에서 전형적인 IT엔지니어 느낌이 났다. 명함을 주고받고 나서 대뜸 “이름이 많이 익숙하네요. 좋으시겠어요”라고 말했다.

기자의 이름은 정태일. 권 대표는 노동운동가 전태일을 두고 말했다. 어색하게 웃는 기자에게 권 대표가 먼저 실토했다. “제가 이렇게 엉뚱해요.” 어려서부터 엉뚱하단 소리를 들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예’라는 대답 대신 어린 시절 얘기를 주저리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한전에서 근무하셨는데 아버지 직장을 따라 이곳저곳 옮겨 다녔어요. 유년 시절, 청소년 시절 대부분 예산, 홍성, 서산에서 보냈죠. 시골이라 여기저기 다니길 좋아했어요.”
권석철 대표이사 인터뷰.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1.06.03
권석철 대표이사 인터뷰.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1.06.03

키가 또래보다 한 뼘은 더 큰 말라깽이 소년은 혼자서 여기저기 다녔다. 깡마른 체격이 행여 놀림이나 받을까 혼자 다니는 게 편했다. 하루는 이른 새벽 산에 운동을 하고 내려오다 길에 버려진 신문 뭉치를 발견했다. 어린 마음에 신문사로 갖다 줬지만 오히려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다. 하교길에 여기저길 헤매다 지갑을 주워 경찰에 갔다주니 그날 저녁 경찰에서 참고 조사 받으러 오란 전화가 오기도 했다.

하지만 권 대표의 엉뚱한 성향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수업 시간 친구들을 웃기기 위해 썰렁한 유머를 일삼았다. 또 그에게는 평범한 교우들보단 비뚤어진 아이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건 재미없잖아요. 거칠어도 정에 굶주린 아이들은 제가 다가가면 온순해졌어요. 그렇다고 같이 비뚤어진 게 아니라 건전한 길로 이끈 거 같아요.”

▶“뭐든지 100번 이상, 끝장 봐야 직성 풀려요”= 엉뚱함은 고도의 집중력을 키웠다. 남들은 이 만큼만 하면 되는데 권 대표는 뼛속까지 엉뚱함으로 열배, 스무배 이상 해야만 하는 집중력, 심지어 집착을 키웠다.

대입 시험에 좌절하고 재수를 결심하던 시절, 스트레스라도 날릴 겸 품바 연극을 보러 갔다. 당시 각설이 타령은 그에게 문화적 충격이었다. 당장 타령 테이프를 구해다가 늘어질 정도로 따라 불렀다. 거울 앞에서 갖가지 표정의 각설이 흉내를 내며 품바 타령에 열중했다. “진짜 200번 이상을 들었나 봐요. 뭐 하나에 미치면 나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빠져들었던 거죠”

영화나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 마음에 드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의 모든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수백번 돌려 봤다. 헤비메탈 음악에 빠지고선 입으로라도 드럼 및 기타 소리를 내면서 전곡을 소화할 정도로 연습했다.

이렇듯 품바 타령이나 연기, 음악은 말 그대로 ‘혼자 놀기의 진수’였다. 그는 철저히 남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춘 채 소심한 놀이에 빠졌다.

이런 그를 세상 밖으로 꺼낸 건 개그맨 오디션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들 즐겁게 해주고 말겠다는 집요한 생각이 기어코 그를 움직였다. 평소 단짝인 친구와 방송국 개그맨 시험에 도전했다. 장르는 꽁트.

“출퇴근 시간 붐비는 지하철에는 서로 타려고 밀치는 푸시맨만 있잖아요, 여기에 안전을 위해 푸시맨을 끌어 당기는 풀맨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였죠. 우리 딴에는 상황극으로 하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기 좋게 낙방했어요.”

▶집착의 종착점 컴퓨터, 운명과도 같은 안철수 박사를 만나다= 권 대표는 재수까지 했지만 원하던 4년 명문대 진학에 실패했다. 대신 전문대 중 가장 점수가 높았던 인하공전 전산과에 입학했다. 권 대표는 눈을 낮춰 지망했기 때문에 장학생 입학은 자신했다.

“시험 접수하고 소설 태백산맥만 열 번 이상 읽었어요. 근데 입학할 때 보니 장학생 명단에 내 이름이 없더군요. 전산과 오는 애들은 다 나처럼 하향 지원 했던 거죠.”
권석철 대표이사 인터뷰.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1.06.03
권석철 대표이사 인터뷰.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1.06.03

장학생은 못됐지만 그는 곧 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바로 바이러스 치료였다.

“어느날 학교 전산실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렸는데 컴퓨터 잘 하는 친구가 후딱 하고 고치더라고요. 나는 어떻게 하는 지 모르겠던데 그 친구는 너무나 쉽게 하니 오기가 생겼죠.”

이때부터 권 대표는 악착같이 바이러스를 파고 들어갔다. 심지어 비싼 의학 서적까지 사가며 바이러스를 샅샅이 해부했다. 전국을 돌며 바이러스 파일을 구했고, 어디 컴퓨터가 고장났다면 제일 먼저 달려가 고쳐주곤 했다. 입소문을 타고 권 대표는 플로피디스크 하나까지 고치는 사람으로 통했다.

같은 시기 권 대표는 마이크로스프트 잡지에 실린 안철수 박사 이야기를 접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죠. 마침 바이러스 제자를 구한다는 소식에 옳거니 해서 직접 찾아 뵀어요. 당시 안 박사님은 지금처럼 순수했죠. 박사님과의 만남은 지금도 여전히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권 대표가 안 박사와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안철수 연구소가 설립되기 전 권 대표는 한국전산원(현 한국정보화진흥원)으로 부터 입사 제의를 받았다.

“박사님은 바이러스만 집중 연구하길 원하셨는데 저는 해킹 등의 범죄에 더 끌렸어요. 국가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곳이 전산원이란 생각을 했어요.”

▶야심차게 들여놓은 마이웨이, 하지만 고난의 가시밭길= 한국전산원은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박사 학위 이수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전문대 졸업생이 낄 자리는 많지 않았다. 권 대표의 원대한 포부는 피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소프트웨어 기획안을 내놓아도 괜히 나선다며 핀잔만 돌아왔다.

그래도 얻은 것은 있었다. 바로 동병상련의 동료들이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이러스나 해킹 연구하는 친구들 보면 집안 어려운 친구들이 많아요. 학창시절 비뚤어진 친구들과 우정 키운 덕을 좀 봤어요.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큰 일 벌이기로 마음 먹었죠.”

권 대표는 1998년 동료들과 하우리라는 보안솔루션 전문업체를 만들었다. 이 때 동료 중 한 명과 결혼하며 일과 가정 모두 새출발했다.

“제가 하우리 설립할 때 국가를 먼저 생각했다면 믿으시겠어요?” 대뜸 그가 물었다. 창업 전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교복사업도 망한 가운데 결혼까지 했는데 그에겐 돈이 먼저가 아니었단 게 의아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돈 벌려고 회사를 차린 게 아니었던가.

“회사 설립하자 마자 바이러스 대란이 터지고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거예요. 그 순간 바이러스 치료 같은 건 누군가가 무료로 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루는 한 경제지 편집 프로그램이 전부 다운되어 신문 자체가 안 나온 적도 있었다. 신문사에서 권 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권 대표는 직접 신문사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해 줬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는 돈을 받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공명심이 컸던 거죠. 뒤늦게 유료화 선언했지만 그땐 이미 무료 백신에 익숙한 시절이었죠.”

권 대표는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쓴웃음은 더 큰 일을 겪은 사람 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다. “유료화 실패하고 회사 상장폐지 됐다고 해서 무료 치료한 거 후회하지 않아요. 교도소 갔다온 것도 그렇고…″

▶모두 버리고 떠난 자살여행, 죽음 문턱에서 잡은 구원의 손길= 물어보기 쉽지 않았던 교도소 얘기를 그가 먼저 꺼냈다.

권 대표는 2005년 3월 하우리로 부터 공금 84억5400만원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고소되면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예멘 국가전산사업에 참여하면서 사채업자에게 권 씨 지분을 맡기고 증자하자는 말에 속아 졸지에 사채 이잣돈으로 나간 돈을 횡령한 꼴이 됐다. 복역 기간은 1년 6개월.

“엔지니어로만 살았으니 경영은 잘 몰랐던 거죠. 제가 한 게 횡령인지 검찰 조사 받으면서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그에게 회삿돈을 가로챘다는 오명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 신뢰였다. 무료로 바이러스를 치료하며 한길만 생각했던 그의 신념과 열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는 절망감을 견딜 수 없었다. “범죄자가 되니까 개그맨 시험까지 봤던 내가 우울증에 빠지더라고요. 돌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죠.”

권 대표는 어느날 홀어머니를 찾아가 식사를 차려달라고 했다. 평소와 달리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는 어머니에게 회사 사정을 이야기 했고 홍콩 출장 가기 전 잠시 여행을 가겠다고 말했다.

“일종의 하직 인사였어요. 홍콩 가서 자살하려고 했거든요…″

권 대표는 순간 당시 모습이 떠오르는지 잠시 울먹였다. 이어 마음을 잠시 가다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반 공기만 먹다가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우고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이 이상했던 거죠. 홍콩 가서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열어보니 가족들이 보낸 장문의 메일이 있었어요. 험한 생각 하지 말라며 돌아오라고…″

절친한 동료도 지금 안 오면 자신이 다 뒤집어 쓴다며 그를 말렸다. 권 대표는 결국 홍콩으로 간 지 하루 만에 돌아와 바로 검찰로 출두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도피설, 자살설이 난무했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부활 의지, 30년 후 화려하게 퇴장하지 않겠나= 온갖 게층의 사람들이 다 몰리는 교도소에 가니 자신이 컴퓨터에만 파묻혀 살아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형수들을 보면서 자살을 생각한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권 대표는 다시 본연의 괴짜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교도소에선 재판날 밥을 비비면 안 된다는 금기사항이 있었다. 재판이 꼬여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의미다. 하지만 권 대표는 항소 재판이 있던 날 버젓이 밥을 비벼 먹었다. 순간 교도소는 술렁였다. 재판 결과가 안 좋으면 두고보자는 협박이 이어졌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고 출소자가 나왔다. 그날 이후 비빔밥 금기는 보기 좋게 깨졌다.

그는 또 교화에 몰두했다. 살아 온 인생 얘기를 나누거나 출소 후 취업이나 사회 복귀 등의 활동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출소 후에도 사회복귀 도우미로 활동 중이다.

“동료들은 싫어하죠. 근데 저는 그런 사람들 만나면서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거죠. 지금도 교도소 사람들하고 연락해요.”

덕분에 사기꾼으로 몰린 꼬리표를 잊고 다시 보안업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렵게 다시 돌아온 만큼 세계를 놀라게 할 소프트웨어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생겼다.

“교도서 가기 전만 해도 이 바닥 안 들어오려고 했는데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내 숙명이구나 했죠. 돈 벌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별로 없습니다. 이왕 하는 거 세계 1등 한 번 만들어 봐야죠.”

그는 다시 일벌레로 돌아왔다. 해외 홈페이지 관리 차 금요일 저녁 미국 출장을 떠나 월요일 오전 귀국해 바로 회사로 출근한다.

그렇게 다시 열심히 달리다 보면 훗날 IT보안의 대가로 변해 있지 않을까. 하지만 권석철이란 사람의 엉뚱함 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머릿속 한 편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30년 후엔 IT 안 할 거 같아요. 요즘 관심 있는 고고학이나 UFO, 아니면 지금 활동 중인 수용자 취업도우미 열심히 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아님 그동안 못다한 가정에 충실한 한 남편이 되도 좋고요.”

<정태일 기자@ndisbegin>

killpass@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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