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대학 러스킨 스쿨 예술사학과 교수인 맬컴 불이 엮은 ‘종말론’(문학과지성사)은 종말에 대한 12편의 글을 묶은 앤솔로지다. 에드워드 W. 사이드 등 각 분야의 석학들이 종교ㆍ철학ㆍ예술ㆍ사회학 등의 시각으로 종말론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이들이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천년왕국’ 사상이다. 나날이 세상은 나빠지고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으며 구세주가 재림해 천년왕국이 도래하리란 믿음. 구약 ‘다니엘서’와 신약 ‘요한계시록’ 등이 생각의 씨앗을 퍼뜨린 이 종말론은 끊임없이 재생ㆍ변주되며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천년왕국 사상의 강력한 원천은 분명 종교적 신념이었지만 불붙은 신념에 기름을 부은 것은 현실의 고통이다. 저자들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것은 묵시의 관념엔 언제나 유토피아 사상이 뒤따르게 마련이며, 종말론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자 ‘미래상에 대한 갈망’이란 것이다. 또 파괴와 폐허로부터 건설과 재생은 시작되기에 천년왕국은 절망이 아닌 희망의 약속인 셈이다. 이에 어지러운 현실을 사는 이들에게 “시대의 두통거리가 바로 희망의 조짐”이 되었고 천년왕국 사상은 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요지다.
크리스토퍼 롤랜드에 따르면 “묵시는 종종 힘없는 자들을 대변해 세상의 불의에 맞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으며, 규범으로 받아들이게 된 현실에 감고 있던 눈을 뜨게”하는 등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천년왕국을 고대하던 사람들은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의 주교가 적(敵)그리스도라 믿었고, 프랑스 혁명기엔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또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시온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종교적 열정이 식은 오늘날, 세속적 종말론은 양상이 다르다. 크리샨 쿠마르는 이젠 “희망 없는 묵시적 상상력만이 남았다”고 말한다. 희망으로 치장할 수 없는 절망의 맨얼굴만 드러나 보일 뿐이란 것이다.
이를테면 영국의 소설가 H.G 웰스는 기술과 과학을 통한 구원을 믿었고 1차 세계대전을 ‘전쟁을 끝낼 전쟁’이라고 생각했지만 전쟁은 보기 좋게 그 믿음을 배신했다. “(인간은) 종(種)적 존재의 막바지에 와 있다. (중략) 호모사피엔스가 인간이 연기할 마지막 배역이 될 것이다”라는 그의 탄식은 희망 없는 종말론을 대변한다.
또 공산주의의 몰락 역시 이 같은 양상을 부채질했다. 혁명(종말)을 통해 부르주아 지배(악)를 끝내고 프롤레타리아(선)가 지배하는 공산주의 국가(천년왕국)를 건설하자는 진보의 신념은 역사적 실패로 드러났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진단대로 역사는 끝났고 자본주의가 최후의 승자로 남았지만, 이는 새로운 시대도 선이 지배하는 시대도 아니다. 자본주의는 단지 ‘차악(次惡)’에 불과하며 인류는 끝없이 우울하고 무력한 노년기를 맞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청사진도 탈출구도 없는 삶을 살며 꿈꾸기를 멈춰야 하는 걸까? 크리샨 쿠마르는 지금 이 땅에 유토피아를 완성했다거나(공산주의) 더 나은 삶이 불가능하단 식의 주장(역사의 종말)을 ‘타락한 천년왕국 신앙’이라 비판하며 새로운 천년왕국을 꿈꿔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분석과 실현 가능한 대안적 삶에 대한 갈망을 포기해선 안 된단 것이다.
허무맹랑하고 근거 없는 낭설로만 치부되는 종말론에 대한 생각을 뒤집고 종말론의 배경과 의미에서,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도출해내는 분석이 새로운 눈을 틔워준다. 단순히 영화의 스펙터클이나 가십성 흥밋거리로 전락한 종말론의 개념을 확장해 어지러운 시대의 자화상을 읽어내고 종말과 미래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김기훈 기자@fumblingwith> / kih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