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미술품과 관련한 구린(?) 뉴스가 지면을 장식했다. 이런 사건이 끊이지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는 ‘저렴한’ 한국사회의 표상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제와 문화의 불균형 때문이다. 미술품이라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단순하게 경제적 교환가치로 생각하는 한 이런 일은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더 비싸고 좋은 미술품들이 얼마든지 많은 유럽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미술품이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민족의, 인류의 것이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술품은‘공공재’라는 생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을 해인사 소유로, 석굴암을 불국사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이들 문화재를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술품은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것’이 되고 만다. 아무리 억만금을 주고 개인이 수장한다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유한한 탓에 그것은 ‘일시점유’에 불과하다. 그들은 많은 대가를 지불하며 우리의 미술품, 문화재를 보존 관리하는 책무를 맡고 있는 셈이며 미술품이나 문화재의 최종목적지는 결국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된다.
우리가 자랑해 마지않는 추사의 세한도(歲寒圖, 1844년, 종이에 수묵, 23x69.2cm)의 오늘까지 흘러온 궤적을 살펴보면 미술품이 결코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추사가 유배생활을 하던 제주도에 찾아온 자신의 제자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주었던 작품이다. 이후 이상적의 제자 매은 김병선(梅隱 金秉善)과 그의 아들 소매 김준학(小梅 金準學)의 손을 거쳐 하정 민영휘(荷汀 閔泳徽,1852~1935)와 그의 아들 민규식(閔奎植, 1888~?)의 수장품이 되었다. 그 후 어찌된 일인지 베이징의 골동상으로 흘러가 일제강점기 경성대학교 교수이자 추사의 연구자인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隣, 1879~19 48)의 눈에 뜨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筌孫在馨,1903~1981)의 노력으로 고국으로 되 돌아왔고, 이근태의 손을 거쳐 손세기(孫世基)의 수장목록에 들어 현재는 아들 손창근이 수장하고 있다. 현 소장가인 손창근은 개인소장품인 세한도를 각종 국공사립박물관에 기획전이나 특별전에 출품해 국민들에게 안복을 누릴 기회를 제공하다 2010년 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함으로서 결국 국민들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는 세한도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비롯해서 겸재의 북원회수도첩등 문화재를 다수 소장한 대 수장가로 몇 년 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미술사 연구기금으로 1억 원을 쾌척한 바 있다. 그의 선친은 약 2000점의 미술품을 서강대학교에 기증, 현 서강대학교 박물관의 모태가 되었다.
미술품은 결국 공공의 것이 되는 운명을 지닌 것이다. 하지만 모든 미술품의 최종목적지가 미술관은 아니다. 적어도 시대를 대변하고 당대를 반영하는 미적가치가 충분한 미술품이라야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미술관이 어떤 미술품을 소장하느냐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동시에 미래의 미술문화를 결정짓는 척도가 된다. 오늘날 한국미술이 노정하고 있는 문제점인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화두가 ‘재미’라는 것으로 오도되는 현상도 실은 미술과이라는 공적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과도하게 민간의 미술시장에 의존하는 시스템, 그리고 우리의 척박한 미술관 문화에서 비롯된다. 공적인‘담론’이 아닌 사적인‘농담’은 세상을 천박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 미술관들은 이런 현실을 충분하고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실천할 여력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미술관이라는 공공의 영역 대부분을 지탱하는 민간미술관의 경우 거개가 개인의 노력과 희생을 전제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건 무리이다. 이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설립 운영하고 있는 국공립미술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현상이 만연하게 된 것은 미술관이 제대로 가능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런 점에서 한국의 공사립 미술관들의 분발이,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착한 부자’들의 선행과 함께 정부의 개입과 투자가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때 보다도 공공의 지원 특히 국가적인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다. 미술품의 최종 목적지인 미술관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작품 소장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한국미술은 커다란 잠재능력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의 취미와 기회에 봉사하는‘재미’를 추구하는 미술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좀 더 지속된다면 한국미술문화의 발전은 고사하고, 우리는 변변하게 후대에 물려줄 제대로 된 문화유산 하나 제대로 갖지 못한 선조로 남을 공산이 크다. 미래의 한국사에서 우리시대가 가장 비 문화적이었던 시대로 기록될까 두렵기까지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술품을 민간이나 시장에만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미술관을 지원하고 육성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미술품의 최종 종착지이자 우리시대의 삶의 궤적이자 미래의 역사를 보관하는 미술관은 문화의 기본 인프라이다. 하지만 미술관에 대한 지원과 육성은 투자규모가 매우 커서 민간의 열정과 사명감으론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미술문화의 공공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미술품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선 그것의 존재가치이다. ‘있기만’ 해도 좋은 느낌을 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둘째 유산 가치이다. 미술품은 미래의 문화적 유산이다. 셋째 명성가치이다. 국민이나 시민들에게 자부심과 긍지가 되어준다. 넷째 혁신적 가치이다. 창의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도구가 된 지금 미술관은 사람들의 창조성을 자극하는 동력을 지니고 있다.
문화란 미술이란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남에게도 무한한 행복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제공하는 공공재로서의 풍성한 문화적 환경 특히 미술환경은 국민개개인에게 철학과 미감을 소유한 자존심 강한 국민을 만들고, 이렇게 개개인이 소유한 각양각색의 문화적, 예술적 감수성은 다양한 매력적인 세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의 영역에 미술작품, 폭넓게는 예술작품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미술품들이 시민들과 만나는 열린 광장이 미술관이다. 따라서 미술관은 미술문화의 꽃인 동시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소비와 생산이 교차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미술문화가 유 무형의 산업으로 작용하려면 미술관의 육성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규모에 비교해보면 우리나라 미술관과 미술문화산업은 여전히 개발도상국가 아니 저개발국가 수준이다. 2010년 말 현재 우리나라의 등록미술관 수는 국립 1개소, 공립 34개소, 사립 105개소, 대학미술관 5개소 등 총 145개소에 이른다. 하지만 이 미술관들 중 우리국민들이 존재가치나 명성가치를 느낄 수 있는 미술관이 있나? 언제부터인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국격을 위해서도 제대로 된 미술관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정책이 작동해야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미술관의 모습은 1.오늘을 매개로 과거와 미래를 담는 공간 2.상상력 발전소로서의 미술관 3.새로운 인문학적 관심을 실천하는 미술관 4.굴뚝 없는 산업-문화산업의 주체로서의 미술관, 5.소비자중심 - 진열장 없는 미술관 6.환경과 생명의 장으로서의 미술관 7.오락과 유희가 있는 공회당 8.문화서비스 실천 주체로서의 미술관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미술관 기부문화와 제도 도입, 미술품의 현물 또는 현금 기증 시 제세혜택 확대와 이를 위한 미술관 인증제도 도입과 대통령직속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위원회를 설치가 시급한 이유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미술문화산업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지정 육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간 우리는 하드웨어 또는 장치산업위주로 국가전략사업을 구성해왔다. 하지만 소프트한 미술관 산업을 통해 실용과 감성 그리고 문화를 취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창의적인 동시에 미래 산업의 가치이다. 뉴욕 MoMA가 당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필름과 건축, 디자인은 물론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한 후 80여년이 지난 지금의 위상을 생각해 본다면 한번쯤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미술문화산업이란 단지 미술품을 사고파는 그리고 그 차익을 얻는 일차적인 수준의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성과와 예술적 성취 그리고 그것들을 연계하여 창출해내는 유 무형의 산업적 이익까지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도 ‘성장에서 성숙의 시대’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미술관을 두어야 한다.
<글,사진=정준모 한국미술산업발전협의회 실무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