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어린시절 즐겨 읽는 환상동화지만 그 중심에는 현대물리학의 핵심주제인 다중세계 이론이 깔려있다. 우리의 우주가 유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개념은 여전히 현실에선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소설과 만화, 영화 등에선 이미 익숙한 단골소재가 됐다. 도플갱어라는 말도 유행이다.
1996년 ‘엘리건트 유니버스’를 펴내 일반인들에게 우주의 신비를 알기 쉽게 들려준 브라이언 그린 컬럼비아대 교수는 “물리학적 다중우주이론은 사변철학의 산물이 아니라 기존 이론들이 확장하면서 필연적으로 마주친 결과”임을 강조한다. 7년 만의 화제작 ‘멀티 유니버스’(원제:THE HIDDEN REALITYㆍ김영사)는 이젠 피할 수 없는 다중 우주 세계로의 초대다. 직면해야 할 현실이자 실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다.
브라이언은 우리의 우주가 유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 그 가능성의 탐색과정을 알기 쉽게 설명해나간다. 가령 우주론을 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찻잔 속의 차로 설명한다든지, 우주적 반복이란 개념을 카드 섞기로 풀이하는 식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개념 대신 많은 생활 속 적절한 비유와 역사적 사례를 통한 친절한 설명은 브라이언의 특장점이다. 일반인들도 우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주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존재와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는게 가능해진 것이다.
책은 아홉가지 버전의 다중우주이론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돼 있다. 누벼이은 다중 우주, 인플레이션 다중우주, 브레인 다중우주, 양자 다중우주, 홀로그램 다중우주 등 아홉가지 버전의 다중우주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시간이 절대적이라 믿었던 뉴턴의 물리학에서부터 시간이 상대적이란 사실을 보여준 아인슈타인, 공간 또한 ’얽힌 고리’ 같다는 것을 밝힌 양자론, 평범한 시공간 속에 다른 차원이 숨어있음을 주장하는 초끈이론까지 망라한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면 어떤 이론에서는 평행우주들이 방대한 시간이나 공간을 경계로 우리 우주와 분리되어 있는가 하면, 다른 이론에서는 평행우주가 불과 몇 ㎜ 거리에서 진행되기도 한다. 심지어 평행우주의 위치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이론도 있다. 또 평행우주를 지배하는 물리법칙도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이론에서는 우리 우주와 물리법칙이 동일하고, 또 어떤 우주에서는 뿌리는 같지만 다른 법칙이 적용되고 있으며, 개 중에는 우리와 전혀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우주도 있다. 더 밀고 나가면 철학자 로버트 노직 교수에 기댄 가능한 모든 우주가 존재하는, 심지어 아무것도 없는 우주, 궁극적 다중우주도 있다.
초끈이론의 권위자인 브라이언 교수 자신의 입장도 기존 과학적 성과에 이어진다.
가령 우주의 반복이란 입장에서 그는 입자의 배열이야말로 실체를 규정한다고 본다. 물리계의 모든 특성은 오로지 입자의 배열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 지구와 태양 은하 등 우주의 모든 만물을 이루는 입자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똑같은 배열을 어딘가에 배열한다면 이들은 동일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는 생명체로 연결된다. 생명체의 육체와 정신이 몸을 구성하는 입자의 배열 상태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된다는 얘기다. 즉 입자의 배열이 결정되면 모든 것이 결정된다. 이는 흔히 물리적 몸뚱이에 비물리적 속성 즉 영혼, 정신, 생명력 등이 곁들여져야 비로소 생명체가 된다고 여기는 통념을 정면 배반한다.
이 책의 성과는 과학의 발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치를 회복시킨 데 있다. 저자는 종교 철학 윤리와 구분되지 않은 고대 과학론에서 인간의 주관이 철저히 배제된 근대과학에 이어 과학과 철학의 상보적 관계를 수학적 논리와 물리학적 통찰로 규명하고 있다. 즉 우리가 수많은 우주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 때 우리의 희소성의 가치 상실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날 적합한 환경의 까다로운 조건이야말로 우주의 비밀에 대한 결정적 단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주가 여러 개일 경우 각각의 우주의 상호작용은 불가피하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은 우주의 미래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저자가 보여주는 멀티 유니버스의 그림은 다중우주 가설이 물리학 이론에 필연적으로 도입된 과정과 그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철학적 통찰로 이끈다. 실체라는 것의 경계, 시뮬레이션, 앎이란 무엇인가, 없음(無)이란 무엇인가, 자유의지 등에 관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멀티 유니버스/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김영사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