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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란 선임기자의 art & 아트> 수많은 비너스들…너는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성곡미술관서‘비잉(BEING)’展 코메리칸 작가 데비 한
대학입학 후 뒤늦은 성장통

초기엔 격렬한 검은 회화


禪·명상으로 안정 되찾고

사진·도예·회화 종횡무진


동·서양 문화적 차이 집중

26년 발자취 존재성찰 담아

작가 데비 한(43)은 한국인 부모 아래 태어나 11살 때 미국으로 이민간 ‘코리안 아메리칸’이다. 미국 LA의 명문 UCLA와 뉴욕의 프랫대학을 졸업한 뒤 지난 2004년부터 한국에 머물며 작업 중인 그가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관장 박문순)에서 초대전을 연다. 전시타이틀은 ‘비잉(BEING): 데비 한 1985~2011’. 

지난 26년간 한국과 미국, 양쪽 모두에서 마이너리티로 살아온 데비 한이 작가로서 걸어온 발자취를 세 파트로 나눠 훑은 전시다. 특이한 점은 역순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살폈다는 점이다.

데비 한은 뒤늦게 성장통을 심하게 앓았다.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주해 힘들게 적응하느라 사춘기를 못 겪은 그는 대학에 입학한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런저런 어려움이 한꺼번에 겹쳐 가슴이 터질 듯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제3전시실(1985~96)에 내걸린 그의 초창기 검은 회화와 드로잉을 보면 그 충격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가늠이 된다. 우주의 블랙홀을 연상시키는 격렬한 회화에선 번민과 고통이 폭발할 듯 분출하고 있다. “성경 하나 달랑 들고 산에 올라간 적도 있다”는 작가는 이후 선(禪)과 명상에 몰입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2전시실(1999~2009)에는 뉴욕시대 작업들이 나왔다. 뉴욕 뒷거리 콘돔과 정크푸드인 초콜릿을 활용한 설치작품은 데비 한이 이제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 현대문명에 시선을 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LA시절 격리됐던 삶이 사회적 관심으로 이동하며 인식의 틀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

이 시기 데비 한은 아름다움과 인간의 욕망, 성욕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후 다시 찾은 한국에서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데비 한은 미국과는 전혀 다른 한국의 상황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코메리칸으로서 묘한 이질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며 이를 갈무리한 작업을 내놓기 시작한 것.

한국의 전통인 도자기에 매료된 그는 청자기법을 이용한 릴리프, 도자기조각을 선보였다.

또 사진, 도자기 회화, 영상작업을 넘나들며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재기발랄하게 표현했다. 

백자 사금파리를 유리박스에 넣은 ‘인식의 양’ 앞에 선 데비 한. 완벽한 미의 표상인 ‘비너스’상을 아시아인의 모습으로 변형시킨 ‘미의 조건’ 작업을 하며 나온 실패작을 한데 모은 것이다.                                                                                                                       [사진제공=성곡미술관]

특히 우리에게 ‘미의 상징’으로 각인된 비너스의 두상에, 뭉툭한 동양여성의 몸매를 합치한 ‘비너스’는 반응이 뜨거웠다. ‘서구적 아름다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어째서 높고 뾰족한 코, 작은 얼굴, 8등신 몸매가 전 세계 여성에게 몽땅 적용되어야 하느냐?”고 반문했던 것. 그래서 나온 작품이 비너스상. 늘씬한 8등신 비너스가 아니라 토실토실한 비너스였다.

그는 또 홍대앞에서 만난 미대 입시생들이 너도나도 아그리파상을 천편일률적으로 그리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1전시실에는 그 아그리파를 지우개 기법으로 비튼 평면작업이 나왔다.

또 일련의 비너스들이 모두 운집했다. 거리를 배회하는 비너스,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하는 도우미 비너스, 찜질방에서 계란을 까먹는 비너스 등 우리 주위에서 무시로 접하는 여성들의 모습에 비너스를 빗댔다.

또 설치작품 ‘개념의 전쟁’은 비너스 상 수십개를 아예 체스판의 병사처럼 도열시켰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얼굴이 모두 제각각이다. 아시아 비너스, 매부리코 비너스,아프리카 비너스는 물론, 아예 눈 코 입이 뭉개진 비너스도 있다.

작가는 한때 서구적 미의식, 백인문화를 쫓는 한국의 세태를 비틀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작업이 한국과 서양에서 전혀 다르게 해석되는 그 ‘문화의 차이’에 집중한다며 “어떤 느낌과 해석이 내려질지 함께 상상해보자는 제안”이라고 전했다.

전시를 기획한 박천남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데비 한의 작업에는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기운이 있다. 명상적이고 집중을 요하는 부분도 있다. 자신과 세상이 사회적인 관습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며 “같지 않다는, 다르다는 것에 대한 차이와 다름을 인정한 그의 작업은 학습되어진, 관성적으로 이어져온 인식의 차이를 재치 있게 뒤집고 있다”고 평했다. 총 전시작은 60여점. 전시는 3월 18일까지. (02)737-7650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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