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쓰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시대에는 글을 키보드로 ‘친다’.
만년필을 꾹꾹 눌려가며 한자 한자 글을 채워가든 그시절에 우리는 얼마나 멀어져 있을까. 0아니면 1이 전부인 디지털시대의 글에는 행간이 사라져 버렸다. 숙고와 정성도 함께 증발됐다. 지난한 퇴고과정이 필수였던 아날로그식 글쓰기에 비해 디지털시대의 글은 수정키로 언제든 쉽게 고칠 수 있다. 아날로그 시대는 상상도 못했던 속도와 편의성으로 ‘글의 민주화’는 눈부실 정도다. ‘배운 사람’들 일부의 특권이었던 대중을 향한 글쓰기도 이젠 누구가 가능하다. 특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달은 글쓰는 사람의 독점을 깨뜨리면서 글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소수의 콘텐츠 생산자, 다수의 소비자로 나눠졌던 콘텐츠 시장도 균형을 맞추고 있다.페이스북을 통해 ‘세계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키겠다’는 마크 주커버그의 꿈은 이뤄졌다. ‘140문자가 세상을 바꾼다’는 트위터 세상도 바로 우리 옆에 있다.
그러나 글의 민주화는 글의 범람과 과잉이라는 다른 문제를 불러오고 있다.
지난달, 서울의 대형서점에서 벌어진 일. 초등학생이 대형서점안에 식당에서 물을 가지러 갔다가 국물을 받아오던 여인과 부딪힌다. 학생은 화상을 입었는 데, ‘원인제공자’인 여인은 사라졌다. 인터넷에 이 사실이 올라오고 SNS으로 순식간에 퍼지면서 이 여인은 뜨거운 국물로 초등학생에게 테러를 한 몰염치한 여인이 되면서 ‘국물녀’로 규정됐다. 하지만 이후 CCTV가 공개되면서 상황은 반전을 맞는다. 서로 부딪혔고 이 여인이 학생을 찾으려 했으나 이미 자리를 떠난 상태. 본인도 손에 화상을 입은 쌍방 피해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소문이 퍼진 속도 만큼 진실은 빠르게 알려지지 않았고 잊혀졌다. SNS시대, 이 여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국물녀’로만 기억될 것이다.
대표적인 SNS인 트위터는 140자에 갇혀 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140자는 자연스레 생각의 파편화를 가져온다. 논리보다는 감정이 앞세울 가능성이 크다. 인터넷과 SNS 발달로 즉각적인 소통은 가능해졌지만 한쪽에서는 그만큼 소통에 대한 갈증이 목말라 하고 있다. 식당에서든 회의실에서든 바로 건너에 있는 사람보다는 스마트폰을 쉼없이 만지작 거리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전세계의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시대지만 정작 우리는 옆집에는 관심이 없다. 소통이 오히려 소통을 막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광장이 열렸지만 오히려 군중들은 고독해지고 있다.
데이터와 지식이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정작 진실하고는 멀어지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앨빈 토플러가 ‘무용지식(obsoledge)의 함정’을 얘기했듯 정보의 홍수와 쓰레기 정보의 범람 속에 항상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지식들은 쓸모가 없어진다. 그만큼 숨가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세상에선 잊혀질 권리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을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지 모른다.
식민지 시대, 고뇌에 사로잡힌 시인은 말한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 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
디지털시대라고 해도 글이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전창협 디지털뉴스센터장/jljj@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