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당대의 문맥에서 읽지 않으면 오류가 생길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그렇다. 15~16세기 이탈리아는 ‘로마의 영광’을 뒤로 하고 사분오열된 상태.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에 덜 주저합니다”란 조언은 강력한 군주에 대한 열망이란 맥락에서 나온다. 근엄한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 군주론은 당연히 금서였다. 지금은 현대정치학의 교과서로 고전 반열에 올랐지만 권모와 술수를 앞세운 구절에선 불편한 것은 여전하다. 마키아벨리즘이 부정적인 용례로 상용되는 것도 이때문이다.
동양의 마키아벨리 ‘한비자’를 예외로 보면 맹자의 왕도정치 등 동양의 군주론이 한국정서에는 친숙하다.
노자 도덕경 17장에 대한 해석이 여럿있지만 지도자의 등급을 언급한 대목이란 해석도 유력하다. 최고의 임금은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것만 아는 유지(有之)’의 리더. 다음이 부하들에게 칭찬받고 존경받는 ‘예지(譽之), 그 아랫단계는 모두가 두려워 하는 ‘외지(畏之)’, 최하는 백성들이 비웃는 ‘모지(侮之)’의 리더다. 마키아벨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군주는 노자의 리더십 분류로 보면 하급이다.
대선 유력후보중 어떤 사람에 대해선 권력의지가 약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도덕경 얘기대로 ‘있는 듯, 없는 듯’ 캐릭터도 있고, 강력한 리더십을 앞세운 후보도 있는 듯 보인다. 수평과 소통을 얘기하지만 권력의지와 강력한 리더십도 중요하다. 마키아벨리가 16세기 피렌치가 아닌 21세기 서울에 있다면 어떤 ‘군주론’을 제시했을 지 궁금하다.
전창협 디지털뉴스센터장/jljj@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