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지도자가 무릎을 꿇는 것까진 기대할 수 없다 해도 진심 어린 사과는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죄는 결국 부메랑처럼 당사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일본은 정말‘ 멀고도 먼 나라’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초로(初老)의 신사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이 신사의 ‘돌발행동’을 지켜본다. 이 장면은 ‘세기의 사진’으로 남아 오랫동안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이미지를 안겼다. 죄를 지은 자는 피해를 당한 이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해야 한다는….
사진의 주인공은 당시 독일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였다. 장소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브란트는 무릎을 꿇었다. 1970년 12월 7일. 그는 묘역에 한 송이 꽃을 헌화한 뒤 몇 발짝 뒤로 물러선 뒤 갑자기 무릎을 꿇고 오랜 시간 동안 묵념을 올렸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무릎을 꿇었지만 브란트의 사죄는 차가운 대리석에 대비돼 그만큼 뜨거웠다. 이를 지켜본 한 기자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는 그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할 사람들을 대신해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했다.
2차대전 전범국가인 독일은 마치 ‘사과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수시로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가슴 깊은 사과를 한다. 1985년엔 독일의 연방대통령이었던 바이츠체커가 2차세계대전 40주년 기념연설에서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된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마음에 새기려 하지 않는 자는 또 그러한 위험에 빠지기 쉽다”고 말했다. 1994년 로만 헤르초크 독일 대통령은 바르샤바 봉기 50주년 기념식에서 “나는 독일인들이 폴란드인들에게 행한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고개를 숙였다.
대선 정국에 휩싸여 별다른 관심 없이 넘어갔지만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줄을 잇고 있다. 지난 17일 차기 총리가 유력시되는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뒤 주변국 반발을 의식해 참배를 자제했던 민주당도 2명의 각료가 다음 날인 18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하타 국토교통상은 “사적인 참배인 만큼 외교에 영향이 없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야스쿠니는 잘 아는 대로 도조 히데키 등 2차세계대전의 A급 전범이 합사된 곳이다. 아직도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한국이나 중국을 생각한다면 일본 정부 각료의 참배가 ‘개인적인 일’이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독일에 비해 일본은 과거사 사죄에 인색하기 그지없다. 1990년 일본 국왕 아키히토는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는 알 듯 말 듯 사과를 했다. 일상적으로 쓰지 않은 ‘통석’이란 단어를 찾아낸 것도 그렇고, 통석이 애석이나 유감 정도의 의미여서 레토릭 이상의 진심은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통석의 염’ 뭐 이런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거면 올 필요 없다”고 말한 것은 MB정부의 치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잘한 일이다. 이후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고작 한다는 사과의 표현도 ‘불행했던 과거’ 정도다.
일본 정치지도자가 무릎을 꿇는 것까진 기대할 수 없다 해도 진심 어린 사과는 불가능한 것인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죄는 결국 부메랑처럼 당사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은 ‘멀고도 먼 나라’다.
전창협 디지털뉴스센터장/jljj@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