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50여일 앞둔 현 시점에서 경제민주화는 탈색되고 변질돼 더 이상 유권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대선후보들은 현 시점에서 경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하는 게 필요하다.
선거는 말 잔치다. 국민들에게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해 표심을 끌어모으는 쟁탈전이다.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감흥시킬 수 있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를 뒷받침하는 공약들을 제시한다. 국민들은 슬로건에서 후보들의 철학과 비전을 읽는다.
올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빅3 후보들은 모두 ‘경제민주화’를 경제 분야의 기치로 내걸었다. 시장의 자율성을 강조하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극심해진 경제ㆍ사회 양극화 해소와 늘어나는 복지 욕구의 해법으로 제시됐다.
사실 외환위기 이후 개방이 가속화되고 지구촌 경제가 하나로 묶이면서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은 우리 생활 속에서 현실화된 지 오래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국내 대기업들이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한편에선 경쟁력 약화로 쓰러지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빈곤층으로 전락하거나 추락할 위기에 있는 중산층을 아우를 수 있는 경제민주화는 대선후보들의 슬로건으로 세울 만하다.
그러나 대선을 50여일 앞둔 현 시점에서 경제민주화는 탈색되고 변질돼 더 이상 유권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 재벌을 공적 삼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수준의 경제민주화를 반길 여유가 없을 정도로 서민들의 생활고는 심각해지고 있다. 대기업들이 비상경영을 외치고 있는 것은 내년에 경제가 더 나빠질 경우 대규모 구조조정을 할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경제는 장기 저성장의 기로에 놓여 있다. 지난 3분기 작년 동기 대비 1.6%, 전기 대비 0.2% 성장은 우리 경제가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나 2008년의 금융위기 때보다 훨씬 심각한 장기 불황의 문턱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성장동력을 확충하지 않으면 일자리를 잃고 빚더미에 허덕이는 서민들의 고통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후보들은 저성장을 받아들이고 그동안 쌓은 ‘부(富)’나 잘 분배하자고 한다. 이는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을 따라가자는 말에 다름 아니다. 파이를 키우지 않고 분배하면 결국 나라 곳간을 텅 비게 해 재정위기의 길로 들어선다. 복지를 하더라도 당장 급한 일자리와 연계되는 생산적 복지를 추진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선후보들은 현 시점에서 경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하는 게 필요하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 김대중 대선후보는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준비된 대통령’론으로 대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이번 대선도 결국은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 후보에게 표가 몰릴 것이다. 따라서 후보들은 신성장동력 발굴, 일자리 창출, 고령화 대책 등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 가슴에 와닿는 기치를 다시 내걸어야 한다. 필요하면 고통 분담도 호소해야 한다. 중국 고전 노자에 ‘신언불미(信言不美) 미언불신(美言不信)’이라는 말이 있다. 믿을 만한 말은 아름답게 꾸밀 필요가 없고, 꾸민 말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믿음을 주는 대통령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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