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중앙에 낡은 당구대가 놓여 있는 스코틀랜드의 한 허름한 펍. 좌절에 빠진 청년들이 말끝마다 질퍽한 상소리를 섞어가며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이들은 이라크전에 투입됐던 스코틀랜드 특수부대 ‘블랙워치’ 요원들이다. 이야기는 펍과 전장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이 전쟁이 얼마나 명분없는 전쟁이었는지, 참전 군인들이 얼마나 심한 상실감과 배신감에 빠져있는지, 전쟁이 국민의 생각과 달리 얼마나 ‘정치적’으로 이용됐는지, 전쟁의 실체가 얼마나 왜곡돼 있는지 리얼하고 박진감 넘치게 보여준다.
최근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의 ‘블랙워치’다. 마치 한편의 ‘마당극’을 보는 것 같았다. 무대 뒷편을 개방해 객석으로 만들어 무대가 객석 중앙에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낸 것은 한국의 마당극과 다를 바 없었다. 지도층의 잘못으로 고통받는 민초의 모습을 서민의 언어를 통해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도 한판의 마당극을 연상시켰다. 관객이 극에 적극 참여하는 한국 마당극의 소통 구조와 차이가 있지만, 이런 연극이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선한 감동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내용의 이 연극이 국립극단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 연극은 2004년 스코틀랜드 특수부대원 800명이 미국 해병 4000명을 대체하기 위해 이라크에 파병된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파병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통해 시나리오를 만들었고,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이 무대에 올려 찬사를 받으며 5개국 40여개 도시에서 공연됐다.
이 연극은 어쩌면 반전과 평화를 주장하는 뻔한 결론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참전 군인들의 생생한 경험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극적 완성도를 높였다. 빵빵 터지는 대포 소리와 총성 등 화려한 음향과 조명, 영상자료를 동원해 극의 재미를 극대화했다. 주인공들도 도덕적이지 않다. 야한 여자 이야기 등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며 낄낄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런 ‘정치 연극’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 사회가 얼마나 개방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인지 보여준다. 그 개방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사회의 수준을 높이고, 문화 콘텐츠의 다양성을 가능케함으로써 경쟁력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다.
만일 한국의 국립극단이 이런 연극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프가니스탄 파병의 부당성과 파병 부대원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연극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좌파로 매도당하고 난도질당하지 않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요즈음 ‘르네상스’를 맞고 있는 한국문화는 상업적 측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해선 현시대의 삶을 녹여내는 보다 다양한 콘텐츠 개발과 그것을 북돋워주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 반대로 문화가 다양성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선도자가 될 수도 있다. 양극화, 실업, 소외, 공동체의 붕괴, 부정부패, 빈곤, 물신주의, 낡은 이념의 공세로 인한 정신적 불구상태 등 과제도 많고 애환도 무궁무진하다. 이러한 우리시대의 모습을 질박하게 담아내는 진짜배기 한판 마당극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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