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인 1982년 11월 14일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이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특설링에서 쓰러진 김득구는 결국 5일 뒤 세상을 떠났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행상으로 아들을 키웠던 김득구의 어머니는 3개월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심판이었던 리처드 그린도 7개월 뒤 자살했다. 흑인이 판치던 사각의 링에서 백인의 우상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챔피언 레이 맨시니는 충격으로 링에서 은퇴했다.
후폭풍도 거셌다. 복싱의 잔혹성이 문제가 됐고, 미국 하원에서 청문회까지 열렸다. 이후 세계타이틀전을 15회에서 12회로 줄이는 등 선수 보호책도 나왔다.
1970년 개발연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복싱이었다. 주린 배로 샌드백을 두드리면서 세계챔피언을 꿈꾸는 복서의 모습은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의 슬로건의 스포츠 버전이나 다름없었다. 먹고 살만해지면서 헝그리정신을 앞세웠던 복싱은 급전직하, 그 자리를 프로야구가 대신하고 있다.
1982년 김득구는 27세, 유복자인 아들을 남겼다. ‘맨주먹 하나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대한민국 만세’ 등을 앞세웠던 그 시절 ‘헝그리정신’이 그리운 건 왜일까.
전창협 디지털뉴스센터장/jljj@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