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정치권을 관통한 화두는 ‘정치쇄신’이다.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정비한 한나라당이 재창당 수준의 쇄신을 하겠다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로고와 상징색까지 교체했다. 19대 국회 개원 일성(一聲)은 ‘쇄신국회’였다. 대선판과 정치권을 강타한 안철수 현상 역시 기존 정치판을 쇄신하라는 국민적 열망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총선과 대선에서 잇따라 패한 민주당은 ‘처절하게’ 반성하고 쇄신하겠다며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결의를 연일 다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 현장은 여전히 구태의 늪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더 깊게 빠져들고 있다. 그렇게 다짐한 쇄신은 온데간데 흔적도 없는 헛구호가 됐다. 1일 오전 통과한 342조원 규모의 새해 예산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원래 예산안의 법정 처리시한은 12월 2일이다. 그런데 벌써 10년째 이 시한을 어기는 부끄러운 기록을 이어갔다. 한데 이번에는 그것도 모자라 연내 처리에도 실패하고 해를 넘기는 사상 초유의 기록까지 세웠다.
처리시한보다 더 한심하고 분통 터지는 것은 통과 예산안의 내용이다. 막판 심의과정에서 지역과 이익단체, 공공기관의 민원 반영을 요구하는 이른바 ‘쪽지’가 무려 4500여건에 달했다고 한다. 300명 국회의원이 평균 15건씩 개별 청탁을 한 셈이다. 국민의 혈세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용도로 쓴 것이다. 더욱이 외부 노출을 우려해 일부 예산처리 관계자들이 호텔방을 잡아 별도로 쪽지예산을 심의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난무한 쪽지 때문에 결국 지역 예산이 5574억원이 늘어났다고 한다. ‘쇄신국회’는 고사하고 ‘쪽지국회’라는 비난과 비아냥거림이 쏟아져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선심성 쪽지예산의 피해는 국방과 미래다. 유력 정치인들의 지역구 예산 증대로 국방예산이 3000억원가량 깎였다. 군 장비 현대화 등 전력 증강에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미래산업기술 개발 등 성장잠재력 확충에 쓰여야 할 연구개발(R&D) 예산도 대폭 줄었다. 쪽지가 미래를 볼모로 잡은 것이다.
행정부의 비효율적 예산 집행과 낭비를 막기 위해 국민들은 국회에 예산 심의 권한을 주었다. 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이 권한을 정치적 이해에 따라 오ㆍ남용하며 마음대로 휘두른다면 이를 거둬들일 수밖에 없다. 쇄신하지 못하는 정치는 어떠한 경우에도 선택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지난 두 차례 선거를 통해 절실히 경험했을 것이다.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누구든 살아남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