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법전이 말했을 때 모든 것이 말해진 것은 아니다. 사회는 완전하지 않다. 관헌도 흔들림을 받을 수 있다. (중략) 재판관들도 인간이다. 법률도 잘못할 수 있다. 법정도 잘못 생각할 수 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을 집요하게 추적하던 형사 자베르가 막바지에서 되뇌는 말이다. 철썩같이 믿어왔던 법과 질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이는 곧 그의 존재 이유의 상실이었다. 그는 번민 끝에 센 강에 몸을 던진다.
최근 영화와 뮤지컬, 출판계를 강타하고 있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새로 읽었다. 군데군데 지루함이 있었지만, 다양한 코드가 담겨있는 고전의 울림은 컸다. 여러 코드 가운데 장발장과 자베르의 갈등구조가 독해의 핵심이었다.
장발장은 굶주리는 동생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감옥에 들어가 19년간 복역한다. 사회에 대한 적개심에 휩싸인 채 출옥해 전과자로 냉대를 받지만, 살아있는 성자 미리엘 주교의 감화를 받고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베 반해 자베르는 엄격한 법 집행의 화신이다. 거기엔 어떠한 타협이나 용서, 관용도 허용되지 않는다. 장발장이 시장과 자선가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지만, 자베르에게 그것은 전과자라는 신분을 가리는 위장술일 뿐이다. 장발장의 변화된 모습이나 새로운 삶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를 체포해 종신형에 처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며 존재이유다.
하지만 장발장이 자비를 실천하고, 밀정 역할을 하다 폭도들에게 잡힌 자신을 풀어주는 관용을 베풀고, 자신도 반란의 와중에 체포했던 장발장을 풀어주면서 자베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다. 목숨처럼 고수해왔던 원칙이 무너지고 법과 질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것이다. 자베르는 번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베르의 자살은 구체제의 파국을 상징한다.
위고는 이를 통해 관용(똘레랑스)과 사랑, 화해의 중요성을 웅변하고 있다. 관용이 없는 사회는 경직되고, 소외계층의 절망을 낳고, 사회를 프랑스 혁명과 같은 소용돌이에 빠뜨린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레미제라블 신드롬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도 바로 이것이다. 성자로 변화하는 장발장이나 혁명의 필연성 못지않게 오늘의 한국 독자를 울리는 코드인 것이다.
현 정부 출범 직후 벌어진 용산 참사나 쌍용차 사태의 경우도 엄격한 법 적용을 외치다 벌어진 비극이었다. 지난 대선 기간 시국선언을 통해 정권교체를 주장한 137명의 작가들을 선거법 위반혐의로 사법처리 수순을 밟는 것도 마찬가지다. 법의 잣대로만 본다면 실정법 위반으로 이들을 무더기 사법처리할 수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주장을 읽으려는 자세다.
지금 한국사회는 최고조의 가치 충돌과 세대ㆍ계층간 갈등을 겪고 있다. 이를 넘기 위해선 권력자의 관용과 포용이 필요하다. 그것이 소통의 출발이다. 자베르의 고백처럼 인간이 만든 법이 완전무결한 것도 아니다. 현실이나 열망을 고려하지 않은 권력자의 엄정한 법 집행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혁명과 혼돈의 시기였던 150년 전 레미제라블이 던진 메시지는 지금 여기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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