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일요일이었다. 1988년 10월 16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한 남자가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 달라고 한 뒤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유리 조각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곧바로 경찰이 들이닥치고 총상을 입은 이 남자는 4시간 뒤 과다 출혈로 사망한다. 광란의 일요일, 14시간에 걸친 끔찍한 인질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9일 전인 10월 8일 공주교도소로 이감 중인 미결수 12명이 호송버스를 탈취했다. 이 중 4명이 가정집을 돌며 절도와 강도를 일삼다가 10월 16일 서울 북가좌동의 가정집에서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한다. 1명은 자수, 2명은 권총으로 자살한 상태, 마지막 남은 지강헌은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외쳤다. 500만원을 훔친 지강헌의 형량은 1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으로 수십억원을 횡령한 전경환은 7년이었다. 권총으로 자살한 안광술은 인질극이 생중계되는 가운데 삿대질을 하며 “어떻게 죄수가 판사 검사를 돈으로 살 수 있어?”라고 절규한다.
인질극은 많은 이에 잊혀졌지만 이들의 목소리에 실린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는 유행어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29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잘못된 관행을 이번에는 확실하게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며 공정한 법 집행을 강조했다. 유전무죄를 외친 범죄자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유전무죄라는 말이 대통령 당선인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말 특사가 비판받는 대목이다. ‘유전(有錢)’이라도 ‘유죄(有罪)’가 되는 세상이 옳다.
전창협 디지털뉴스센터장/jlj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