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관계’에 익숙한 한국 남자
‘친구관계는 빈곤하기 짝이 없어
‘진실한 우정, 노년기 행복의 척도
‘메마른 삶, 벗 만나 치유하길…
“대한민국 남자에게 꼭 필요한 건 10대엔 엄마, 20대엔 여자친구, 30대엔 신부, 40ㆍ50대엔 아내, 60대엔 마누라, 70대엔 부인”이라는 말이 있다.
3050세대 남성들은 ‘여자’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그만큼 대한민국 남성들은 친구에 관한 한 빈곤하기 짝이 없다. 상사가 시키는 대로 앞만 보고 달려 왔던 30대를 거쳐 40대엔 관리자로서 몸과 머리가 모두 바쁘고, 50대에는 무거운 책임감 속에 업무의 결실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위치이다 보니 ‘친구는 사치’였던 것이다.
생애학회 회원인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 학술대회에서 “일하는 성인 남성들의 우정은 대인관계의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2차적인 특성이 강하다”고 했고, 심리학자 E.H.에릭슨도 “이 시기 발달과업이 직업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결국 성인 남성들이 정서적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친구보다 배우자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학교수인 김모(50) 씨는 우연한 기회에 30년 만에 옛친구를 만나 그간 느껴보지 못한 유쾌함을 경험했고, 참석자들과 의기투합해 저녁식사 후 무작정 고향 인근인 정동진까지 갔다가 동틀 무렵 상경한 적이 있다고 한다. 우정의 빈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지속가능한’ 옛 친구 복원이 쉬운 것은 아니다. 음식점을 경영하는 조모(45) 씨는 “20여년 전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반가운 마음에 만나면 ‘애가 몇이냐’ ‘요즘 먹고살기 어떠냐’고 몇마디만 하면 할 말이 별로 없어 서먹해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친구의 소중함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불행이 진정한 친구를 가려준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좀 계산적이다. 성인의 친구에 대해 현실감 있는 시사점을 던져주는 격언은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알버트 까뮈와 현대사상가 엘리자베스 폴리의 말이다.
“내 앞에 걷지 마세요. 내가 따르지 않을 수 있잖아요. 내 뒤에 걷지 마세요. 내가 이끌지 않을수 있잖아요. 그냥 내 옆에서 걸어가며 제 친구가 되어 주세요.” (알버트 까뮈)
"진정한 친구 사이의 가장 아름다운 깨달음은 서로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언제나 함께 성숙한다" (엘리자베스 폴리)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나 들추자고 친구가 있는 게 아니라, 한동안 떨어져 있었을 지언정 정서적ㆍ현실적 공감대를 높이거나 차이를 좁히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은퇴 이후 우정은 삶의 질을 결정한다. 전혜정 연세대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 기대의 저하, 동질성을 갖는 사람들의 감소로 인해 대인관계가 축소되는 노년기에 사회적 연계의 끈을 유지한다는 것은 성공적 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자식 다 키운 이후 ‘의무감으로부터의 해소’는 해방과 고독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위기이자 기회다. 노년기 친구관계는 제약이 적고, 자발적이어서 탄탄하며, 자신의 사회적 유용성과 가치를 재확신하게 해 주는 효과를 낳는다.
여성들은 서로를 돌보거나 비밀을 공유하는 특성 때문에 친구 간 유대감이 강하지만, 오랜 ‘갑을 관계’에 익숙한 남성은 우정 만들기에 약하다. 이 때문에 노년의 우정은 동호회, 봉사 등 ‘임무형 고리’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요즘 40ㆍ50대조차 사회에 불만이 많다. 그들의 불만요인을 쪼개 보면 경제적 이유, 교과서 대로 굴러가지 않는 사회문제에 대한 것도 있겠지만, 앞만 보고 달려오는 바람에 생긴 피로감과 건조해진 정서도 작용했을 것 같다. 피로와 고독 속에 행복을 얘기할 수는 없다.
명절이 오면 친구들을 만난다. 어릴 적 친구 별명 함부로 부르지 마라. 경청하고 이해하며 현실적 교집합을 구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친구라는 ‘삶의 질’을 얻기 어렵다. 국민에게 한 턱 쏘는 ‘개발통치’가 물러가고, 지금은 바야흐로 마음과 생활을 살피는 ‘행복정치’시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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