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이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디즈니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훌루’(Hulu)가 아닌 넷플릭스로 공개됐다면 훨씬 더 강한 글로벌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무빙’은 원작 웹툰의 작가 강풀이 직접 각본을 맡아 촘촘히 쌓여지는 캐릭터들의 탄탄한 서사와 원작을 초월하는 싱크로율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형 히어로물이 제대로 취향저격됐다.
‘무빙’은 초능력을 플렉스 하기는커녕 숨기고 고뇌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그속에는 성장 서사도 있고, 애틋함과 먹먹함, 감동의 정서도 있다.
나는 ‘무빙’의 초능력자들이 ‘마블’의 슈퍼히어로들보다 더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의 왕국’ 같은 동물이 나오는 영상을 보면, 새끼를 잡아먹으러 침입하면 어미가 침입자가 누구건 사력을 다해 방어한다. 대부분 방어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미가 치명적 상처를 입기도 한다. 어미는 상대의 힘과 능력을 따져가며 상대하지 않는다.
‘무빙’에서 재만(김성균)은 평소 어눌하지만, 아들인 강훈이가 위험하다는 말만 들으면 초스피드 괴력을 발휘한다. 다른 초능력자들도 마찬가지다. 이것과 동물의 세계가 뭐가 다른가? 둘 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다. 지구를 구하고, 뉴욕시가 연상되는 고담시를 구하러 오는 아메리칸 스타일인 마블영화속 슈퍼히어로보다 훨씬 더 보편성이 있다.
미국의 연예 전문지 롤링스톤지가 “‘무빙’은 스타워즈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서 나오는 시리즈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TV 슈퍼 히어로 시리즈다. 철저히 한국적인 희생의 이야기와 영웅 서사가 바탕이 돼있다”고 극찬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무빙’ 박인제 감독이 인터뷰에서 “마블 영화제작자는 편당 1천억을 쓰는 집단이다. 우리는 영리하게, 독창적으로 길을 찾아야 했다. ‘무빙’속 인물들이 땅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실적인 사람들이라는 점도 중요했다”고 말한 부분과도 일맥상통한다.
‘무빙’속 남한 초능력자나 북한 기력자들은 훨씬 더 인간적이다. 한마디로 ‘무빙’속 대한민국 히어로는 사랑하는 이들, 즉 가족 지키기다. 가족의 안위가 1순위다. 부모만 자식을 지키는 게 아니고 자식도 부모를 지킨다.
체육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달리기를 익히는 장희수(고윤정)는 결국 위기에 처한 아빠인 장주원(류승룡)을 만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아빠에게 달려오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다.
봉석(이정하)은 정준화(양동근)에게 “우리 엄마 건들지마”라며 준화를 공격한 후, 다친 엄마 미현을 정원고 옥상에서 업고 나르는 장면은 과거 어린 봉석을 업고 남산돈가스 가게를 열만한 집을 찾아보며 먼 길을 걷던 미현과 교차되자 큰 성장을 이룬 봉석이 대견하기도 하면서 벅찬 감동이 전해져 눈물이 났다
모범생 반장 강훈은 매일 가게 앞 편상에 덩그러니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아빠가 답답하겠지만, 항상 그 시간에 맞춰 집으로 가 아빠에게 인사부터 하고 들어간다. 휴대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고 엄마에게 침을 뱉는 ‘금쪽’이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부모가 자식을 지키는 건 모성애, 부성애라는 단어를 동원하기 이전에 본능이다. 하지만 K-아빠는 자기 자식만 구하는 게 아니라 남의 자식도 구한다.
지하 하수구 액션신에서 재만(김성균)을 잡으러 온 주원(류승룡)은 혈투를 벌였지만, 청계천 노점상을 하던 재만 옆집인 수족관의 어린 아들 성우(이지우)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은 이 아이부터 구출한다.
하수구 결투신은 재만과 주원간에 이뤄지지만, 나중에는 잡는 사람과 잡히는 사람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서로 수갑으로 연결돼 공감하는 순간에 감동의 물결이 밀려온다. 마지막에 주원은 재만에게 “반갑다 괴물아. 나도 괴물이거든. 집에 가자. 니 아들 기다리잖아”라고 말해 감동을 배가시킨다.
주원은 엄지다방 ‘레지’ 출신인 황지희(곽선영)을 만나 늘 하던대로 커피나 한잔 할 때는 초보순정남이지만, 가정을 이루고는 책임지는 인생을 산다. 봉석의 아빠 김두식(조인성)도 자신은 북한까지 가는 비밀지령을 수행하면서도, 이미현(한효주)과 봉석을 철저히 지킨다. 둘 다 책임지는 사랑이 멋있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북한 보위부장으로부터 남한 기력자 양성계획을 박살내기 위해 그 파일을 가져오라는 지령을 받은 김덕윤(박희순)은 정준화(양동근)에게 “당신은 먼저가라. 가야할 이유가 있잖아. 가족이 있잖니”라고 말한다.
흉악한 범죄 뉴스가 자주 나오는 이맘때 필요한 건 오히려 진부하고 촌스럽다고 느껴질 수 있는 가족지키기이고 순정이라는 가치다. 미현(한효주)은 번개맨을 좋아하며 뜨는 능력을 가진 아들 봉석에게 “초능력? 그게 뭔데. 중요한 건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하는 게 무슨 영웅이야. 그건 아무 것도 아냐”라고 말한다. 가난해도 이렇게 가정이 따뜻하면 사이코패스들도 조금 덜 나오지 않을까.
wp@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