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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금개혁, 또 국민 뜻 무시(?)…엉뚱한 정치, 엉큼한 정부 [홍길용의 화식열전]
보험료율∙소득대체율 수치에 논란 집중
野‘노후안정’ vs與‘재정안정’ 이념대결로
가입자 “국고지원∙수익률제고” 한목소리
OECD 공적연금 정부기여도 韓이 ‘꼴찌’
기금고갈 못막으면 자산시장 붕괴 뻔해
저출산 극복 못하면 연금체계 지속불가
기업복지 의존 높으면 출산 의욕 꺾일수
재정건전 보다 국가안전망 구축이 시급

‘더 내고 더 받자’

‘더 내기만 하자’

국민연금 개혁안 논란에 대한 대부분 미디어의 요약이다. 덜 내고 더 받기는 염치가 없고 더 내고 덜 받자니 억울하다. 더 내고 더 받는 게 언뜻 가장 좋을 듯싶다. 그래서일까? 국민연금 개혁안을 시민대표단에 투표로 붙였더니 이 안이 채택됐다. 더 내기만 해야한다는 쪽에서는 복잡한 연금에 대해 잘 모르는 시민대표들이 재정부담을 간과한 채 연금 급여만 높이려 했다고 지적한다. 과연 그럴까?

▶국민의 진짜 뜻은 공적연금 다운 국민연금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의 공론화위원회(공론위)가 지난 22일 발표한 연금개혁 공론화 시민대표단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설문 항목을 보면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외에도 연금개혁의 방향을 붇는 중요한 내용들이 많았다. 주요 질문과 그에 대한 투표단의 찬성률을 정리하면 이렇다.

√ 의무가입 상한 연령을 60세에서 64세로 높이고 수급개시연령은 만 65세로 유지하자(80.4%)

√ 국민연금 기금을 청년주택, 공공어린이집 및 노인 시설에 투자하자(57.5%)

√ 국가의 국민연금 지급에 대한 의무를 국민연금법에 명시하자(92.1%)

√ 사전적 국고 투입을 통해 미래 세대의 과도한 부담을 완화하자(80.5%)

√ 국민연금 기금운용 수익률 제고를 위해 지배구조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하자(91.6%)

보험료를 더 많이 더 오래 내자는 데에는 가입자들의 이견이 없어 보인다. 정부의 지급의무 명시, 국고 투입, 수익률 제고에 거의 한 목소리를 냈다. 소득대체율 상향을 원했지만 연금의 재정 불안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국민들이 진짜 큰 목소리를 낸 부분을 간과한 채 이번 개혁의 핵심을 ‘더 내고 더 받자’, ‘더 내기만 하자’로 추린다면 큰 잘못이다. 총선처럼 ‘야당은 1번’(노후안정)과 ‘여당은 2번’(재정안정)이라는 대립구도를 만들려는 정치권의 모습도 위험해 보인다.

▶기금 고갈, 피하지 못하면 경제 파국

우리 경제에서 국민연금기금 고갈 위험은 일종의 ‘초객체’(hyperobject)다. 노력하면 피할 수도 있지만 그 실체를 간과해 대비하지 않으면 대재앙이 될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이다.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2040년 1755조원 규모가 될 기금이 2041년부터 매년 보유한 주식·채권·부동산 등을 팔기만 하면 자산시장은 어떻게 될까? 제 값에 사줄 곳이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경제여건이 좋지 않을 듯하다. 한국은행이 제시한 우리나라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2030년대 0.6%, 2040년대 -0.1%다. 국민연금 기금의 약 절반은 국내 자산이다. 경제성장 전망도 나쁜 나라의 자산을 살 이가 얼마나 있을까? 빠르면 17년 뒤 닥칠 일이다. 사줄 사람이 적어 보유자산 가격이 하락한다면 고갈 시점은 예상보다 훨씬 빨라질 게 뻔하다. 자산가격이 대폭락하는 대재앙, 경제공황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일단 기금이 고갈되면 그 해 걷은 보험료로 연금 재원을 충당하는 ‘부과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이 경우 가입자가 부담할 보험료율이 25% 이상, 최대 35%에 달할 것이라는 게 보건복지부 5차 재정계산 결과다. 이때쯤엔 현재 8% 수준인 건강보험료율(장기요양보험 포함)도 두 자릿수를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직장가입자는 그나마 회사가 나눠 낸다. 자영업자는 홀로 부담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자영업자가 가장 많은 선진국이다. 가계 빚도 많다. 민간이 이 정도의 공적연금·건강보험 부담을 지게 되면 경제성장을 위한 충분한 소비는 불가능해진다. 불황은 소득 감소를 낳아 연금재정도 더욱 악화될 게 뻔하다.

국민연금 개혁의 핵심은 기금 고갈을 막는데 있다. 가입자가 더 내고, 덜 받으면 된다. 더 내면 지금이 어렵고, 덜 받으면 미래가 어둡다. 지금도 부담되고 미래도 막막한 제도라면 의미가 없다. 의무 가입을 폐지하거나 가입을 강제한 정부가 그 책임을 다하는 게 유일한 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연금 제도의 최대 수혜자이만 기여는 거의 없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 정부, 문제해결 책임은 회피 권한 행사만

국민연금법은 정부에 관리운영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부담시키고(87조) 있다. 국민연금공단의 연간 관리운영비 5500억원 가운데 정부 부담은 100억원에 불과하다. 물가가 많이 올랐는데도 13년째 제자리다. 고작 100억원을 내지만 정부는 국민연금 이사장을 비롯한 공단 인사권을 행사한다. 기금운용 통제권도 갖는다. 국민연금 기금이 국내 주요 기업들의 대주주다. 정부는 국민연금 보유 지분을 통해 은행을 비롯한 주요 대기업의 지배구조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금운용 수익률 제고를 위해 지배구조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제대로 강화한다면 정부 영향력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재정안정에 무게를 둔 이들은 ‘더 내고 더 받자’가 되면 국민연금 누적적자가 2093년까지 2700조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부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현재 국민연금법은 국가에 국민연금 지급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다. 2700조원의 적자는 모두 가입자 부담이다. 정부는 국민연금 적자를 보전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정부담과 수혜의 불균형에 따른 세대 갈등도 국민들의 몫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국민연금 부담을 떠안으면 구성원인 공무원 집단의 노후보장 여력이 약화될 수 있다. 공무원연금에는 퇴직(연)금도 포함된다. 공무원의 고용자인 국가가 지급의무를 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지금도 공무원연금 적자를 국고로 메우고 있다. 앞으로 국고 보조는 더 늘어나게 된다. 국민연금 적자를 국고에서 지원한다면 자칫 공무원연금 보조 여력이 그만큼 약해질 수 있다.

▶ 연금재원 국고지원이 유일한 해결책…가입자·정부·적립금 3각 축 갖춰야

기금 고갈을 막고, 가입자나 정부의 잠재부담을 줄이려면 예방적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정부가 재정으로 국민연금을 조기에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10년 동안 GDP(국내총생산)의 1%(약 22조원)를 매년 국고로 보조하는 재정지원이 가능하다면 보험료 인상을 3%포인트로 제한하거나 기금운용의 목표수익률을 6.3%까지 낮게 잡을 수 있다”는 계산을 내놨다.

국회 연금특위 자문위원인 김우창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도 “국민연금 개혁이 늦어져 늘어난 부담은 국민이 잘못해서 생긴 게 아니다”며 “정부가 일반 재정에서 GDP의 1% 정도를 투입하면 보험료율을 3%포인트만 올리고, 기금 운용수익률을 1.5%포인트만 높여도 재정 안정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재정계산위 위원이었던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국고를 투입하면 세대별, 소득계층별 차등부담 갈등도 풀수 있다”며 “조세 부담을 연령대별로 구분해 보면 40대 이상이 총근로소득세 납세액의 78.9%를 부담하고 소득분위별로도 상위 10%(10분위)가 총근로소득세의 73.1%를 납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국민이 의무가입하는 연금에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는 나라다. 국민연금의 모델인 일본 후생연금도 가입자 부담인 보험료는 상한을 정하고 부족한 재원은 정부가 낸다. 미국은 사회보장세를 걷어 사회보장보험을 운영한다. 법률에 의해 국가가 가입자에 혜택을 제공할 의무를 갖는다. 연금이 고갈되면 정부가 예산을 동원해서라도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연금의 보험료율이 선진국 보다 크게 낮다는 점도 사실과 다르다. 선진국은 대부분 적립기금이 소진되거나 감소해 가입자가 낸 보험료에 정부 보조금을 합해 급여 재원을 마련한다. 독일(18.6%), 스웨덴(17.2%), 일본(18.4%) 등의 보험료율이 우리나라(9%) 보다 높지만 이들은 정부가 재정으로 연금을 지원한다. 정부 지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가입자의 부담이 훨씬 낮다고 보기도 어렵다.

최근 정부는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며 지출을 아끼고 있다. 그렇게까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까? 우리만 보지 말고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보자. 우리나라 가계·기업 빚은 GDP 보다 많지만 정부 부채비율은 약 55%로 선진국(111%)의 절반이다. GDP 대비 정부 수입(2023년)은 23.9%로 선진국(35.5%)에 한참 못 미친다. 정부 지출도 24.9%로 선진국(41.1%) 보다 크게 낮다.

▶ 정부 직무유기 이제 그만…국가 사회안전망 강화해야 저출산 극복 가능

우리 정부가 빚이 적은 것은 살림을 잘해서가 아니라 선진국 대비 그만큼 역할을 덜 했다는 뜻이다. 재정의 중요한 기능이 자원의 효율적 재분배이고 그 핵심이 노후·건강보장 등 사회안전망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대비 정부의 복지제도가 미비한 대신 기업과 근로자의 상대적 부담이 크다. 은퇴를 하면 기업이 부담했던 부분도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고령화에 아주 취약한 구조다. OECD 내 가장 심각한 노인빈곤이 더 심해질 것이란 우려는 그 동안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

국가 사회안전망이 미비하면 기업 의존도가 높아진다. 전체 일자리에서 일부만 차지하는 대기업에 대한 선호가 커진다. 대기업 입사를 위한 교육 경쟁이 심화된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초저출산의 바탕에는 부모와 아이 모두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 어렵다는 불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저출산은 연금은 물론 경제에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다. 정부는 건전한 재정을 유지하는데 집착하기 보다는 아이와 부모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연금 기금의 고갈도 막을 수 있다. 저출산이 극복되면 연금의 위기도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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