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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세 소녀가 軍지휘관이라니!”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했던 그녀 행보…어땠길래[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잔 다르크 편]
[역사편 122. 잔 다르크]

“조국 구하라” 음성 들었다는 시골 소녀
백년전쟁 결정적 순간 등장 압도적 활약
기적 또 기적…이례적인 상황 거듭 연출
결국 포로로 잡혀 이단 재판…그 끝은?
알베르 랭슈, 잔 다르크(일부 확대), 1903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5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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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소녀
존 에버렛 밀레이, 잔 다르크, 1865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군이 쏜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그녀 주위 모두가 얼어붙었다.

잔은 혜성처럼 등장한 열일곱 살 소녀였다. "잉글랜드군이 에워싼 프랑스군과 오를레앙 성을 구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 이 아이는, 정말 신의 가호를 받는 듯 잘 싸웠다. 이상하게 잔이 가는 곳에만 승리가 있었다. 몇 번이고 이러니 잔을 무시하던 이들 다 그녀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무슨 일인지, 그간 유리할 게 없던 프랑스군은 곧 잉글랜드군의 포위망을 뚫을 진용을 갖출 수 있었다. 반년 넘게 이어지던 공방전을 기어코 승리로 끝맺을 모습이었다.

잔은 그런 결정적 순간에 적군의 일격을 맞고 만 것이었다.

화살은 그녀 목과 어깨 사이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참모들은 모처럼 피어난 조국의 꽃이 너무 빨리 지는 데 절망해 굳은 것이었다.

조지 프레데릭 왓츠, 잔 다르크, 패널에 유채, 32.4x19.5cm

그런데,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급소를 맞고 주저앉은 잔은 외려 눈을 더 크게 떴다. "올리브유를 가져다주세요." 그녀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받은 기름을 상처 부위에 쓱쓱 발랐다. 그게 끝이었다. 잔은 얼마간 힘을 빼고 있는가 싶더니, 이내 기운을 차렸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런 잔을 본 프랑스군은 감격에 젖었다. 많은 이는 잔이 앞서 보여줬던 또 다른 믿기 힘들었던 일을 곱씹었다. 가령 그녀가 '목소리'를 듣고 판 땅에서 보검(寶劍)이 나온 일, 강을 건널 때 기도 한 번으로 바람을 바꾼 일 등을 떠올렸다. "신이 프랑스와 함께 하신다!" 모두가 검과 창을 더 높이 쳐들었다.

장 자크 쉐럴, 잔 다르크의 오를레앙 성 입성, 1887, 500x374cm

프랑스군은 잔과 함께 한 첫 전투에서 이미 잉글랜드군 100여명을 죽였다. 그것부터 정말 오랜만에 거둔 승리였다.

석궁 화살을 맞은 그녀가 철인(!)의 면을 보인 무렵 전투에선 또 500여명을 사살했다. 그렇게 5000명 가량 잉글랜드군 중 십분의 일 이상을 몰살했다. 잔은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기적의 소녀로 인식되고 있었다.

1429년, 4월. 잔은 오를레앙 성에 온 뒤 아흐레 만에 상황을 뒤집었다.

이제 기세등등한 건 잔과 함께하는 프랑스군이었다. 누구도 예상 못 한 흐름이었다. 그간 이곳의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 손아귀에 맥없이 조여져 있을 뿐이었다.

쥘 외젠 르네프뵈, 갑옷을 입은 오를레앙 성의 잔 다르크, 1886~1890, 500x375cm, 캔버스에 유채, 팡테옹
쥘 외젠 르네프뵈, 갑옷을 입은 오를레앙 성의 잔 다르크(일부 확대), 1886~1890, 500x375cm, 캔버스에 유채, 팡테옹

쥘 외젠 르네프뵈〈갑옷을 입은 오를레앙 성의 잔 다르크〉에서 오를레앙 성 공방전 당시 그녀 모습을 상상해 그렸다.

흰 피부, 앳된 얼굴의 잔이 검과 깃대를 든 채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 윤기 나는 갑옷, 위풍당당한 자세가 위엄을 더한다. 휘날리는 깃발에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와 두 천사는 신성한 기운까지 안겨준다. 이러한 잔의 명령을 받은 프랑스군이 반격에 나선다. 파죽지세로 나선 프랑스군은 전우와 적의 시신을 뛰어넘고 열심히 창끝을 때려 박는다.

프랑스군은 오를레앙 성 공방전에서 끝내 승리했다. 이를 발판 삼아 드디어 전쟁 주도권도 쥐었다. 길고 지난했던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 백년전쟁의 끝도 보이기 시작했다. 잔은 이 모든 일의 시발점에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프랑스, 어쩌면 세계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여인이었다.

“계시를 받았다”
외젠 티리옹, 음성을 듣는 잔 다르크, 1876, 캔버스에 유채, 225x163cm,

"어서 조국을 구하거라."

시점을 앞당겨 1428년의 어느 날. 그러니까 아직은 잉글랜드군이 오를레앙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을 무렵. 잔은 고심 끝에 이러한 신의 계시를 따르기로 했다. 이때 나이가 열여섯이었다.

사실 잔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이보다도 3년 전부터 신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소녀여. 프랑스를 구하라." 그것은 신성한 음성이었다. 들판을 걷던 그녀는 순간 울림을 느꼈다. "네 조국을 짓밟은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거라." 그녀는 한 번 더 내려오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구름 틈으로 모습을 보인 건 대천사 미카엘과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였다.

쥘 외젠 르네프뵈, 양치기 소녀 시절 잔 다르크, 19세기경

그럼에도 잔이 신의 음성에 곧장 응하지 않고 3년 남짓 고민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1412년께 프랑스 동레미에서 출생한 잔은 말단 관리의 딸이었다. 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며, 할 줄 아는 건 농사와 가축을 치는 일 정도였다. 신이 '쓰임'을 위해 점찍기에는 너무 평범했다. 르네프뵈〈양치기 소녀 잔 다르크〉에서 당시 그녀의 모습을 묘사했다. 허름한 옷에 수수한 가방을 두른 잔이 맨발로 양을 치고 있다. 반쯤 투명한 성 미카엘이 그런 그녀에게 검을 건네려고 한다. 나무 위 두 성녀 또한 그녀를 부추기고 재촉한다. 이들은 매년, 계속 등장했다. 이러니 잔도 결국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 그들은 내게 말을 걸고, 훈계하며 내가 해야 할 행동을 알려줬다. (…) 그들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다정했다."

훗날 잔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한 수레급의 행운
쥘 바스티앙 르파주, 잔 다르크, 1879, 캔버스에 유채, 254x279.4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렇다면 잔이 다른 일도 아닌 '조국 수호'의 명령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프랑스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잔이 살던 시대,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백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는 두 나라(그 시절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꽤 넓은 영토를 갖고 있었다!)가 지난 1337년부터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대륙에서 벌인 전쟁을 뜻한다. 싸움은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1453년, 즉 116년간 싸웠다고 해 백년 전쟁이다.

오귀스트 드 크루즈, 샤를 6세

1428년.

잔은 이 대전이 후반부에 접어든 무렵 계시를 받았다. 당시 프랑스 왕은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샤를 6세였다. 즉, 아직은 프랑스파가 왕위를 잇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흐름도 곧 끝날 것처럼 보였다.

지지부진하던 전쟁은 기어코 잉글랜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파에는 잉글랜드 국왕 일가(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5세와 그의 아들 헨리 6세)와 부르고뉴파(프랑스의 유력 가문)가 있었다. 프랑스파에는 프랑스 국왕 일가(발루아 왕조의 샤를 6세와 샤를 왕세자)와 아르마냑파(프랑스 왕실 지지파)가 속해있었다.

잉글랜드파는 이 무렵 프랑스 북부 지역에 빼곡하게 깃발을 꽂고 있었다.

흐름을 탄 잉글랜드파는 이번에야말로 잉글랜드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6세를 잉글랜드·프랑스 공동 왕으로 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프랑스파는 이 와중에 결집은커녕 유례없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일단 국왕 샤를 6세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았다. 사리 분별도 하지 못한 그는 갑작스럽게 죽어버리기까지 했다. 프랑스파 입장에선 발루아 왕조를 지키려면, 헨리 6세에게 '왕관 날치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빨리 샤를 왕세자를 왕위에 올려야 했다.

장 푸케, 샤를 왕세자(샤를 7세)

하지만 정작 프랑스파의 핵심 인물인 샤를 왕세자는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다.

승기를 쥔 잉글랜드군은 기어코 프랑스파의 마지막 요충지인 오를레앙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곳을 무너뜨린 뒤 샤를 왕세자가 사실상 도피 상태로 있는 시농성을 함락할 구상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왕관은커녕 목숨부터 위태로운 상태였던 것이다. 샤를 왕세자는 그가 마음먹는다고 한들 대관식(戴冠式)을 할 곳도 없었다. 프랑스 전통상 대관식은 북부 도시 랭스에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 또한 이미 잉글랜드군에 넘어간 상태였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구원의 검에 키스하는 잔 다르크, 1863, 캔버스에 유채, 61.2x53.2cm, 스트라스부르 근현대 미술관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파에 서게 된 잔이 해야 할 일은 간결했다.

첫째, 잉글랜드군이 포위한 오를레앙 성을 구할 것. 둘째, 샤를 왕세자를 랭스로 데려가 대관식을 치르게 할 것. 이를 이루려면 한 수레급의 행운과 축복이 필요해보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

‘신의 뜻’대로 영광
알베르 랭슈, 잔 다르크(일부 확대), 1903

시골 양치기 소녀가 샤를 왕세자를 알현(謁見)한 자체가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신께서 저를 보냈습니다." 시농성 회의실까지 온 잔 다르크는 곧장 샤를 왕세자 앞에서 무릎 꿇었다. 모두가 이 장면에 경악했다. 이유가 있었다. 사실 샤를 왕세자는 웬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소녀가 그에게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기꾼이지 않을까. 그는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시종에게 왕세자 옷을 입히고, 본인은 시종 옷을 입은 채 사람 틈에 섞여 있었다. 진짜 신과 함께라면 이 정도 속임수야 간파하리라는 생각이었다.

잔은 변장한 샤를 왕세자를 콕 집어 찾았다. 그의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랬다. 이러니 프랑스파 모두 소녀의 기이한 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잔은 곧 샤를 왕세자에게 약간의 병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를레앙 성 수비군(프랑스군)에 합류한 잔은 그곳 간부들에게 전략부터 바꿀 것을 요청했다. 방어 말고 공격 태세로 바꿔야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잔은 행동으로 보여줬다. 깃발을 든 잔과 그녀의 병사가 성문을 활짝 열고 외려 잉글랜드군을 향해 진격한 것이다. 잔은 끊임없이 승전보를 전했다. 잔과 그녀의 군은 약속된 승리를 쟁취하는 신의 기사단 같았다.

안 마테이코, The maid of Orleans, 1886, 캔버스에 유채, 484x973cm, 포즈난 국립박물관

"그곳에서 신이 부르신다."

그렇게 오를레앙 성을 구한 잔은 이번에는 이 말과 함께 랭스로 진격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샤를 7세 대관식의 잔 다르크, 1854, 캔버스에 유채, 240x178cm, 루브르 박물관

1429년, 7월.

오를레앙 성 공방전이 끝난 후 고작 2개월여가 흐른 시점. 잔의 프랑스군은 잉글랜드파 소유였던 랭스를 점령했다. 잔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샤를 왕세자는 드디어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샤를 7세에 올라 정통파의 맥을 이을 수 있었다. 잔은 대관식 내내 샤를 7세 옆에서 깃발을 들고 있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샤를 7세 대관식의 잔 다르크〉에서 잔 다르크의 영웅같은 면을 세련되게 표현했다. 주인공은 샤를 7세가 아닌 잔이다. 위엄있는 표정과 건장한 몸, 제단에 손을 올린 모습의 잔은 이미 금빛 후광을 달고 있다. 화려한 은색 갑옷 차림의 그녀는 고개 들어 하늘을 향해, 신에게 대고 감사를 표하고 있다. 이때가 잔의 절정기였을 것이다.

소녀의 패배
앙리 엠마뉘엘 펠릭스 필리포토, 파리 공성전 당시 잔 다르크. 1858

"이 도시를 프랑스에 넘기십시오."

대관식이 치러진 해, 9월. 잔은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는 대륙 내 가장 유서 깊은 땅에 닿았다. 파리였다. 잔의 프랑스군은 성벽을 하나씩 뚫었다. 역시 성녀라는 생각이 들 찰나…. 일이 터졌다. 파리 수비군 궁수가 잔에게 화살을 또 꽂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잔의 허벅지가 관통당하고 말았다. 잔은 비틀댔고, 곧 넘어졌고, 이내 피를 콸콸 쏟았다. 출혈이 금방 멎는다는 식의 기대하던 '기적'은 없었다. "동레미의 소녀가 드디어 쓰러졌다!" 잔의 이러한 모습은 외려 파리 수비군의 사기만 올려줬다. 잔의 군대는 철수해야 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프랑스군의 치솟던 기세도 꺾였다. 결국 파리 공방전은 잉글랜드파의 승리로 끝맺었다. 잔의 패배였다.

"잔은 더는 신의 사자로서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떠받들더니 한 번 크게 졌다고 이런 소문이 퍼졌다. 사실상 잔 덕에 왕이 된 사내, 샤를 7세가 이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는 잔이 파리를 공략하던 당시 지원군도 느릿느릿 내보냈다. 그가 그러지 않았다면 파리 공방전이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을 터였다.

샤를 7세는 왜 태도를 바꿨을까.

왕관을 쓴 그가 그때부터 잔의 입지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백전불태의 잔이 갑자기 "신은 내가 왕이 되길 바라신다"며 반란을 일으키면? 샤를 7세 입장에선 아예 상상하지 못할 일이 아니었다. 샤를 7세는 이제 잔을 견제해야 했다. 그에게선 잔의 패배가 필요했다. 때마침 파리 공방전이 있어 이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분석이다.

아돌프 알렉산더 딜렌스, 체포된 잔 다르크, 1847~1852, 패널에 유채, 53x72cm, 에르미타주 미술관

하지만 잔은 신이 '그만 됐다'고 할 때에야 물러날 마음이었다.

신은 여전히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잔은 그래서 1430년 5월에 다시 출정했다. 향하는 곳은 파리 인근 콩피에뉴였다. 잉글랜드파가 프랑스파 지역 콩피에뉴를 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그러나 당시 잔의 병사는 고작 200~400명뿐이었다. 샤를 7세가 역시나 정치적 이유로 관심을 보이질 않은 탓이었다. 잔은 콩피에뉴 공방전에서 재차 무너졌다. 잉글랜드파는 이번 전투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 잔. 이 소녀를 포로로 붙잡은 것이다. 아돌프 알렉산더 딜렌스가 붙잡힌 잔의 모습을 그렸다. 화려한 복장의 잔은 여전히 꼿꼿하고, 변함없이 냉철해보인다. 장궁을 든 적군이 주먹을 쥐며 협박해도 오직 위만 올려다볼 뿐이다.

‘이단’ 희생양이 되다
존 젤리코(1841~1914), 이단 재판을 받고 있는 잔 다르크

"어떤 상황이든 피고는 신의 은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단(異端) 심문관이 잔 앞에서 이렇게 물었다. 함정 질문이었다. 잔이 고개를 끄덕이든, 가로젓든 "한낱 인간 따위가 신의 뜻을 단언하는가"라는 말로 오만의 죄를 씌울 마음이었다. 쇠사슬을 찬 처지가 된 잔은 잉글랜드파의 파리에서 이단 재판을 받고 있었다. 잉글랜드파는 어떻게든 잔이 이단임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야 잔 주도로 이뤄진 프랑스파 샤를 7세의 대관식도 무효로 할 수 있었다.

폴 들라로슈, 윈체스터 추기경에게 심문을 받는 잔 다르크

그러나 겨우 자기 이름이나 쓸 줄 알던 잔은 재판 중 경이로운 수준의 수사학(修辭學)을 구사했다.

가령 '신의 은총'에 대한 함정 질문에는 "은총을 받지 못했다면 내려주시기를. 은총을 받고 있다면 계속해주시기를"이라는 말로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오만 아닌 겸손을 보인 것이다. 이밖에 "당신이 본 천사는 옷을 입고 있었는지(판사님은 신께서 천사에게 옷 입힐 능력도 없다고 믿는지요?)", "성 미카엘의 몸에 털이 있었는지(그렇다면 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요?), "당신이 심판을 받을 것을 천사가 미리 경고하지는 않았는지(제가 무슨 위험에 처해있는지요?)" 등 날이 선 질문을 영리하게 받아쳤다. 잔은 그렇게 70명으로 이뤄진 이단 심문관 무리를 격파했다.

질로 생 테브르, 감옥에 갇힌 잔 다르크, 1833, 캔버스에 유채, 119x109cm

하지만 당연히도 잉글랜드파는 잔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이들은 잔을 가두고 묶은 채 더 매섭게 다그쳤다. 잔도 지쳤다. 그녀의 몸은 아직 열여덟 살 아이였다. 결국 잔은 잉글랜드파 교회의 처분에 무조건 따른다는 문서에 이름을 썼다. 그런데, 잉글랜드파는 잔의 서명 이후에도 그녀를 계속 군사 감옥에 방치했다. "수녀원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짓밟은 채.

잔은 이쯤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잔이 특히나 견디기 힘든 건 음흉한 남자 간수와 병사들이었다. 저들은 곧 일을 저지를 것처럼 보였다. 저놈들에게 순결을 빼앗기는 일 자체도 끔찍하지만, 그렇게 되면 곧장 가짜 성녀로 몰릴 게 뻔했다. 결국 잔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재차 남자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잉글랜드파는 잔의 이 행동을 또 문제로 삼았다. 남장을 고집하는 일 자체가 성경을 거역하는 일이라고 질타했다. 잉글랜드파는 이를 빌미로 다시 이단 재판을 열었다. 결과는 이단 확정. 잔은 화형 선고를 받았다.

쥘 외젠 르네프뵈, 화형당하는 잔 다르크, 1886~1890, 캔버스에 유채, 팡테옹

1431년, 5월 30일.

'이단·재범·이교도·우상숭배자'라고 쓰인 종이관을 쓴 잔이 루앙의 시장터에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발밑에서 치솟는 불길을 보고도 태연히 있었다. 르네프뵈는 이러한 잔의 최후 모습도 그렸다. 백색 옷을 입은 잔이 무기력하게 나무 기둥에 묶여있다. 사형 집행인은 쇠사슬을 더 강하게 조인다. 병사들은 땔감을 채우는 데 여념 없다. 긴 십자가를 쥔 잔은 신과 마지막으로 소통하려는 듯하다. 이제 소명이 끝난 게 맞는지를 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를 화형대로 몰아넣은 이들을 용서합니다." 잔은 연기에 휩싸여 숨지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열아홉 살, 무척이나 꽃다운 나이였다. 잔이 그렇게 죽은 후에도 프랑스파와 잉글랜드파는 백년전쟁을 22년간 더 이어갔다. 잔의 등장 뒤 대세는 프랑스파로 기운 상태였다. 끈질기게 피어났던 화약 연기는 1453년 프랑스파의 승리로 걷힐 수 있었다. 끝끝내 잔을 외면했던 샤를 7세는 백년전쟁을 끝내고나서야 그녀의 명예를 회복시켜줬다. 가톨릭교회는 1920년, 잔을 성녀로 정식 시성했다.

알렉상드르 에바리스트 프라고나르, 잔 다르크, 1822년경

잔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스터리했다.

잔의 삶 중 일부에는 과장도 섞여있겠지만, 전체를 허구라고 볼 수는 없다. 시선도, 입장도 달랐던 프랑스파와 잉글랜드파 모두 그녀의 기적과 활약상에 대해선 비슷한 기록을 남겼다는 게 근거다. 잔은 어떤 인물인가. 그 시대의 살아 움직이는 기적이었던 건 확실하다.

쥘 외젠 르네프뵈(Jules Eugène Lenepveu·1819~1898)
역사화와 종교화 등에서 감각을 뽐낸 프랑스 화가. 그는 프랑스 정부가 우수자에 한해 로마 유학 기회를 제공하는 로마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5년간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등 옛 거장의 작품을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프랑스로 돌아와선 다시 만국 박람회에서 2위 메달을 따는 등 실력을 거듭 입증했다. 로마 내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총장을 지내는 등 당대 예술계에서 정점에 오르기도 한 인물. 대표작은 〈비텔리우스의 죽음〉, 〈카타콤베의 순교자들〉 등.
아돌프 알렉산더 딜렌스(Adolf Alexander Dillens·1821~1877)
벨기에 출신의 딜렌스는 초기에는 주로 역사화를 즐겨 그렸다. 형은 밝고 경쾌한 화풍의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화가였던 헨드릭 조셉. 딜렌스는 그보다 아홉 살 많은 친형에게 그림 지도를 받은 뒤부터는 농촌화를 그리는 데 전념했다고 한다. 딜렌스의 대표작은 〈유혹〉, 〈청혼〉 등.

〈참고 자료〉

백년전쟁 1137-1453, 데즈먼드 수어드, 미지북스

벌거벗은 세계사 : 전쟁편, tvn 〈벌거벗은 세계사〉 제작팀, 교보문고

Joan of Arc, Mark Twain, Ignatius Press

Joan of Arc, Helen Castor, Faber & Faber

펠릭스 아를리히, 잔 다르크, 1931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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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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