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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승호 ”첫 연극 너무 못했다…배우로서 한계 마주해“ [인터뷰]
데뷔 25년 만에 첫 연극 무대 도전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월터 역
“관객 리뷰 충격…중압감에 8kg 빠져”
배우 유승호 [YG엔터테인먼트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치킨을 달라고 했는데, 알몸이 된 백숙을 준 할머니 앞에서 기겁을 하더니 서러운 눈물(2002년 ‘집으로’)을 흘렸다. 그 시절 무수히 많은 이모팬들을 낳았던 꼬마는 소년으로 성장해 드라마 ‘선덕여왕’(2009)의 비밀병기 김춘추로 날아올라 ‘국민 남동생’ 시대를 열었다. 착실히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다져온 배우 유승호(31)는 데뷔 25년 만에 연극에 도전해 뼈아픈 기억을 새겼다.

“너무 못했어요. 사무치는 피드백도 많았고, 스스로 판단해도 그랬어요. 배우로서 가진 기술이 너무나 부족하고 배워야 할 게 많다는 것을 깨닫고 알게 됐어요.”

유승호의 연극 데뷔는 올 한해 배우 전도연의 ‘무대 복귀’(‘벚꽃동산’)와 함께 엄청난 화제였다. 게다가 유승호의 배우 커리어에서 다시 없을 파격적인 인물이 된 작품이었다. 미국 극작가 토니 쿠슈너가 쓴 ‘엔젤스 인 아메리카’ 속 프라이어 월터. 성소수자였고, 에이즈로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인물을 만나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꺼내야 했다. 연극계 스타 연출가이자 배우 정경호, 수영 등을 무대에 올린 신유청의 작품인 만큼 공연계에서도 기대가 컸다.

지난 달 말 총 60회 중 30회의 모든 공연을 마친 유승호는 무대 위의 시간을 복기하며 자신을 돌아봤다.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난 그는 “일단 끝났으니 후회하진 않지만, 내가 다시 연극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계를 많이 봤다”고 했다.

그간 유승호에게 연극이나 뮤지컬 제의는 상당히 많았다. 내내 고사했던 것은 ‘무대 공포증’ 때문이었다. 그러다 “30대가 되고 보니 이렇게 피하기만 하면 무슨 발전이 있을까 싶었다”는 생각에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다. 때마침 캐스팅 제안이 들어온 작품이 ‘엔젤스 인 아메리카’다. 유승호는 “제안과 함께 번역도 제대로 되지 않은 대본을 읽었는데, 읽으면서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로 연극 무대 신고식을 치른 배우 유승호 [글림컴퍼니 제공]

연극은 1980년대 밀레니엄을 앞둔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소수자 다섯 명이 겪어야 하는 차별과 혼란의 이야기를 그린다. 파트1(밀레니엄이 다가온다)과 파트2(페레스트로이카)로 나뉘어진 이 작품은 올해 200분에 달하는 파트1로 관객과 먼저 만났다.

“신유청 연출님과의 미팅 자리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대본을 읽어봤지만,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지 ‘단 한 구간도 이해를 못하겠다’고요. 연출님께서 ‘괜찮아요, 다른 배우들도 다 모를 거예요. 할 수 있어요. 공부하면 안되는 건 없어요.’라고 말해주시더라고요.”

그 말에 용기를 내 험난한 길에 들어섰다. 그는 “마음 속에 여러 고민이 있었지만, 나는 믿지 못해도 연출님은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배우로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도 컸다.

연습 기간 3개월.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하기에 앞서 배우들은 미국 역사와 성경 공부를 먼저 했다. 유승호는 “가장 걱정이 됐던 것은 20년 이상 된 오래된 작품인 데다 한국인에겐 익숙치 않을 1980년대 미국의 이야기라는 점”이라며 “대본을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 관객들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돌아봤다.

유승호가 무대 위에서 집중했던 것은 인간의 보편성이다. 성 정체성, 종교, 인종 등 사람들의 삶에서 벌어질 일들과 무수히 많은 차별이 연극 기저에 자리한다. 그는 “논쟁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인류애’가 이 작품의 큰 줄기라고 생각했다”며 “동성 커플이라고 해서 이성 커플과 다른 사랑을 하고, 병에 걸렸을 때 아픔의 크기가 다르진 않을 거라고, 다른 종교를 향한 믿음이 나쁜 신념일 거라고 판단하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 삶 안에서의 여정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배우 유승호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첫 무대는 내내 긴장 상태였다. ‘사시나무 떨듯’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대사만 틀리지 말자”는 마음으로 무대를 마쳤다. 3층까지 객석이 있는 대극장 무대는 유승호의 강점을 모두 보여주진 못했다. 속눈썹의 떨림과 흔들리는 눈동자마저 의미를 부여하는 섬세한 감정연기가 강점인 유승호에게 무대와 객석의 거리는 지나치게 멀었다.

그는 “늘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다 보니 저에게 부족했던 면을 많은 감독님들께서 편집과 음악으로 채워주셨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무대는 민낯을 보이는 기분이었다. 오롯이 내가 가진 것으로만 전달해야 하는데 계속 한계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1, 2회 공연 이후 관객 리뷰를 찾아보며 유승호는 “너무나 창피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엄청난 가격의 티켓값을 들여 굳이 먼 길을 오는 분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것에 어떤 사과를 해도 부족하더라고요. 게다가 애초 저의 자리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어떤 배우들은 너무나 이 무대에 서고 싶었을 텐데 저로 인해 기회를 얻지 못한 분들도 계셨을 테니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첫 공연부터 백신을 세게 맞으니 다음 무대부턴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관객 평가들을 보고, 무대에 익숙한 배우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씩 고쳐나갔다. 중압감이 만만치 않았다. 연습 기간에 에이즈 환자 캐릭터 소화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기도 했지만, 정작 공연이 시작된 이후 살이 더 쭉쭉 빠졌다. 긴장과 스트레스 때문에 정상적인 식사를 할 수 없었던 탓이다. 체중 64㎏으로 공연을 시작한 그는 마지막 공연에선 56㎏까지 빠졌다.

그는 “이번 연극 도전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됐지만, 관객들이 돈과 시간을 들여 오는 이 귀한 자리를 감히 배우로서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며 “연극을 또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면 조금 더 자유롭고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뮤지컬 출연 제안도 적지 않다. 사실 업계에서는 유승호의 뮤지컬 무대는 센세이션할 것 같다는 반응도 있다. 그는 “뮤지컬 무대에 서면 많은 분들이 다른 의미로 놀라실 것”이라며 “노래는 다른 분들이 해야한다”며 웃었다.

배우 유승호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25년 간 그 흔한 말실수나 논란, 사건 사고로 인한 물의 없이 한 길을 걸어왔다. 유승호는 업계에서도 25년차 배우답지 않은 겸손함과 예의범절이 몸에 밴 ‘유교보이’다.

아역 시절 매니저 역할을 해왔던 그의 어머니는 누구보다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촬영장에 가면 시작과 끝엔 모든 스태프에게 반드시 인사를 하도록 예의범절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린 마음에 하기 싫던 날도 있었는데, 어머니는 10년이 넘게 인사와 예절을 강조하셨다”며 “그 경험이 있어 지금도 선을 넘지 않고 지내는 것 같다. 사실 예의가 없는 것과 쿨한 것은 다른데, 그것을 혼동하지 않고 어느 자리에서나 예의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카메라 앞에서 살았기에 이제는 배우가 아닌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는 “점점 좋아했던 것이 사라지고, 이 일이 아니면 무엇을 해야할 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고민하며 ‘고양이 집사’로 안온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ISFP(호기심 많은 예술가, 성인군자형)인 유승호의 낙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모습이라면 그는 스스로를 “엄청난 청소광”이라고 말한다는 것. 그는 “내게 가장 안전한 곳은 집이라고 느껴 언제는 나를 받아들여줄 수 있는 공간으로 단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며 “먼지가 쌓여있는 걸 못 견뎌 갈수록 집과 청소에 집착하게 된다”며 웃었다.

연극 도전으로 시련 아닌 시련을 겪었지만, 유승호의 깊은 고민은 그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한다. 바람이 있다면 다시 최선을 다해 주어진 역할로 더 많은 사람들과 교감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진심이 느껴지는 배우라면 좋겠어요. 나만 아는 진심이라면 그건 전달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의 진심과 감정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게 연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지점을 찾아가려고요. 좋은 배우이고 싶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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