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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임윤찬이 선택한 그 피아노…이 사람 손에 달렸다 [백스테이지]
88개의 건반 ‘피아노 조율’의 오묘한 세계
세계 최고는 게르하르트…한국은 이정규
분해하고 치료해 새 생명 주는 ‘명의’
김선욱 임윤찬은 따뜻한 음색 선호
국내에선 생계 유지하기도 어려워
하나의 무대가 만들어지기까진 수많은 이야기가 담깁니다. 스포트라이트는 무대 위의 ‘주인공’에게 쏟아지나, 그 뒤엔 자신의 이름을 감춘 무명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가장 완벽한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물질하며 자신만의 숨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갑니다. 무대 뒤의 모든 존재를 담아 들려드립니다.
[영상=마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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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임윤찬 [목프로덕션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직 문을 열지 않은 텅 빈 공연장. 고요한 이 공간엔 오직 단 둘만이 존재한다. ‘피아노와 피아노 조율사’. 이제부터 이어질 수 시간의 독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들만의 대화가 시작된다.

우아한 흑조처럼 고고하게 선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는 낱낱이 분해돼 맨몸을 드러낸다. 비스듬히 세워졌던 덮개가 사라지자 정교한 수작업의 정수를 마주하게 된다. 벌어진 건반 사이를 닦고 조이고, 시간이 묻힌 오래된 녹을 정성스레 훔쳐낸다. 그런 다음 88개의 건반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100만분의 1의 차이를 잡아낸다. 숨 막히는 긴장감과 적막한 고요, 영롱한 음이 가끔씩 들려올 뿐, 사람의 언어는 자취를 감춘 이 시간을 조율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조율을 하는 것은 큰 공연장에 오로지 피아노와 나만 존재하는 고독한 시간이죠. 조율사들은 이 때 피아니스트가 독주를 한다는 생각으로 피아노와의 대화를 합니다.” (김현용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 회장)

‘1만 시간의 법칙’을 뛰어넘는 세계가 있다. 매일 3시간씩, 10년간 같은 노력을 기울이면 ‘전문가’의 길에 접어든다고 했던 이 법칙은 ‘조율사의 세계’에선 통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피아노는 악기를 넘어 삶 그 자체다. 오랜 시간이 만들어내는 감각만이 승부수가 되는 직업, ‘피아노 조율사’다.

명실상부 세계 ‘최고’로 불리는 울리히 게르하르츠 영국 스타인웨이 지사장이 최근 한국을 찾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스타인웨이 모델 D의 조율 시연을 가졌다. [삼성문화재단 제공]
피아노 조율사는 ‘명의’…정확한 진단과 처방 내려

세계적인 전설 알프레드 브렌델부터 안드라스 시프, 예브게니 키신, 랑랑과 유자왕, ‘K-클래식 스타’ 김선욱 임윤찬까지….

명실상부 세계 ‘최고’로 불리는 울리히 게르하르츠 영국 스타인웨이 지사장은 ‘스타 피아니스트의 조율사’이자 ‘조율사들의 꿈’이다. 영국에서 공연하고 음반을 녹음하는 전 세계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노는 그의 손을 거친다.

최근 한국을 찾은 그의 손끝에서 또 하나의 피아노가 새 생명을 얻었다. 독일 함부르크의 장인이 만든 1990년생 스타인웨이 모델 D. 서울시립교향악단이 가지고 있는 피아노다. 삼성문화재단의 국내 피아노 조율사 양성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조율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 피아노를 손봤다. 사실 게르하르츠와 이 피아노의 만남이 처음은 아니다. 그가 2017년 한국을 처음 찾았을 때 서울시향에서 이 피아노의 ‘치료’를 요청한 바 있다.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에 따르면 피아노의 평균 수명은 약 15년 안팎이다. 1990년에 태어난 이 피아노는 올해로 34세이니, 이미 전성기를 지났다고 할만 하다. 김현용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 회장은 “오랜 시간 동안 이곳저곳 다치고 망가지고 고장난 곳을 찾아 정확한 처방을 내리는 피아노 조율사는 명의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했다.

게르하르츠의 작업엔 장인의 정교함과 섬세함, 완벽주의자의 집요함이 담긴다. 그는 “피아노 조율에서 관건은 조율사에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느냐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주어지는 시간에 맞춰 작업을 완성해야 하기에 시간이 길수록 ‘소리의 완성도’는 더 높아진다. 게르하르츠가 온전히 작업을 하기 위해선 총 8시간이 걸린다. 피아노 조율 작업은 피아노의 해체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나아간다. 독일 출신인 그는 ‘파워 J’로 순서와 원칙에 맞춰 A부터 시작해 Z까지 모든 과정을 꼼꼼히 지킨다.

사실 게르하르츠와 같은 명장이 아닌 보통의 조율사들에겐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조율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모든 피아노에겐 조율이 필수적이지만, 조율에 엄청난 투자를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서인수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 부회장은 “피아노는 보통 일 년에 한 번 조율을 해야 하는데 콘서트장의 피아노가 아닌 학원이나 일반 가정집의 피아노는 시기마다 조율을 하지 못하는 데다 1시간도 안되는 시간 동안 소리만 만져야 하니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성인 피아노 학원의 업라이트 피아노가 늘 습기를 머금은 소리를 내는 것이 수강생의 실력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이정규 조율사가 조율한 낡은 피아노로 연주회를 가진 다니엘 린데만 [마포문화재단 제공]

조율 과정에선 피아노들이 살아온 ‘세월의 길이’도 중요하다. 게르하르츠는 “주로 10~15년 사이에 있는 피아노의 재정비 작업을 한다”고 했다. 오래된 피아노일수록 조율 작업은 더 오래 걸리고, 조율을 한다 해도 온전한 소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한국의 1세대 조율사인 이종열 명장의 제자로 38년간 조율을 해온 이정규 조율사 역시 최근 20년 이상된 영창 피아노를 조율했다. 지난달 마포아트센터 야외광장에서 열린 다니엘 린데만의 음악회를 위해서다. 그는 당시 이 피아노를 되살리기 위해 3번이나 조율 작업을 했다. 이정규 조율사는 “처음엔 이 피아노가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기름칠을 하고 해머를 깎고, 페달 연결선을 다시 조여주고, 타현 거리를 조정하는 등 여러 차례 많은 공을 들이자 피아노가 조금씩 살아났다”며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피아노들은 사람의 관절처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뻑뻑하고 반응이 느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조율을 두 번, 세 번 거듭하면서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율사들은 피아노를 ‘기계 악기’라고 말한다. 피아노는 정교한 수작업을 통해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진다. 게르하르츠가 피아노를 해체해 하나 하나 때를 지우고 벌어진 틈을 조여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스위스의 시계 장인들마저 엉성해 보일 정도로 정교하다. 그가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첫 걸음부터 완벽해야 ‘이상적인 소리’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상=윤병찬PD]

게르하르츠는 “독일에서의 조율이 원래 과정과 순서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오래된 피아노일수록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 습기로 인해 구조적으로 뒤틀리거나 달라진 곳을 손봐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피아노 조율은 사실 ‘자동차 정비’와 같다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피아노 조율사 양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삼성문화재단 정유진 책임은 “자동차가 주기적으로 정비를 받고 기름 때가 없어야 엔진이 잘 돌아가듯이 피아노 역시 청소를 말끔히 한 뒤에 본격적인 작업을 해야 더 좋은 소리가 난다”고 말했다. 이렇게 피아노를 분해하고 수리하는 과정은 엄청난 노동을 필요로 한다.

피아노를 해체하고 말끔히 청소한 뒤엔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한다. 피아노 조율은 보통 ▷조율(피아노 줄의 장력을 조절해 정확한 음정을 찾는 것) ▷조정(페달과 피아노 해머 등의 부속품을 조절해 음색을 바꾸는 것) ▷정음(줄과 해머를 정돈애 음질을 다듬는 것) 등 3단계를 거친다. 조율사들이 “가장 매력적이고 섬세하다”고 말하는 단계는 조율이다. 서인수 부회장은 “조율은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면서도 음악을 듣는 일이기에 조율사들은 조율 단계에 돌입하면 항상 힐링이 된다”고 말했다.

피아노는 88개의 건반과 250여개의 줄로 이뤄진 악기다. 건반을 누르면 연결된 해머가 각각의 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타현악기’다. 해머가 내리친 현들이 공명하면 아름답고 다채로운 소리가 만들어진다. 피아노를 ‘작은 오케스트라’로 부르는 이유다. 조율사들은 같은 건반을 수십, 수백 번을 누르며 ‘소리’를 찾아간다. 보통 유럽에선 장 3도, 6도에 기반을 두고 완전 4도, 5도를 섞어 조율한다. 그는 드라이버로 현을 1㎜ 단위로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음정을 잡아낸다.

명실상부 세계 ‘최고’로 불리는 울리히 게르하르츠 영국 스타인웨이 지사장이 최근 한국을 찾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스타인웨이 모델 D의 조율 시연을 가졌다. [삼성문화재단 제공]

정확한 음정을 찾아내야 하는 조율은 물론 조정과 정음도 타고난 귀와 오랜 시간이 만든 감각이 있어야 이상적인 소리를 찾을 수 있다. 30㎏에 달하는 조율사의 공구함엔 목수와 같은 기술자처럼 다양한 장비가 채워져있다. 드라이버는 물론 소리굽쇠, 망치, 바늘 등이 음악의 세계를 열어줄 주인공들이다.

게르하르츠는 “피아노 상태에 따라 작업 시간은 저마다 다르지만 총 소요시간의 50%는 조정, 50%는 조율과 정음 작업에 쓴다”고 했다. 조정 작업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드는 것은 해야하는 작업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조율사들의 ‘공식 매뉴얼’상 조정 작업은 총 60개. 그 중엔 현을 내리치는 해머의 면을 깎아 양손이 같은 속도와 크기로 현을 칠 수 있도록 다듬는 과정도 포함된다. 0.01㎜의 오차를 바로잡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음은 연주자들이 원하는 음색을 만들어가는 ‘최후의 단계’다. 한여름 습기로 인해 무겁고 칙칙해진 음색을 맑고 깨끗하게 다듬는 것, 건조하고 메마른 가을날 거칠어진 소리를 부드럽게 다듬는 것이 정음 작업이다. 해머를 샌딩하는 파일링, 강한 소리를 부드럽게 하는 리들링과 같은 작업이 포함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다. 게르하르츠는 피아노곡을 연주하기 위해선 ”반드시 피아노와 피아니스트, 조율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조율사는 보이지 않는 영웅이다. 김현용 회장은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는 것은 피아니스트이지만, 그 뒤엔 조율사들의 10~20시간의 노력이 담겨있다”고 말했다.

명실상부 세계 ‘최고’로 불리는 울리히 게르하르츠 영국 스타인웨이 지사장이 최근 한국을 찾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스타인웨이 모델 D의 조율 시연을 가졌다. [삼성문화재단 제공]
그라모폰 주역들의 조율사…“임윤찬이 선택한 피아노는 따뜻한 음색”

지난 2일(현지시간) 런던에서 열린 영국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에서 한국인 피아니스트 최초로 피아노 부문과 젊은 음악가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임윤찬의 첫 스튜디오 앨범 ‘쇼팽:에튀드’의 탄생에도 ‘조율 명장’ 울리히 게르하르츠가 있었다.

임윤찬은 영국 런던의 헨리우드 홀에서 이 음반을 녹음하기에 앞서 자신의 음색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피아노를 고르기 위해 그를 찾았다. 영국에서의 ‘피아노 조율’의 모든 것은 게르하르츠의 손을 거친다. 그는 영국 전역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물론 영국 유일의 콘서트홀 조율사다.

게르하르츠가 런던 공연이나 음반 작업에 쓸 수 있도록 보유하고 있는 피아노는 총 12대. 게르하르츠는 “모두 다 나의 자식 같은 피아노”라며 “임윤찬의 음반 녹음은 나의 작업장에서 이뤄졌는데 스타인웨이 D모델 중 6대를 보여줬다. 그는 그 중 가장 많은 캐릭터, 다양한 음색을 담고 있는 1, 2번 피아노로 녹음을 마쳤다”고 했다.

게르하르츠는 명실상부 스타 피아니스트의 0순위 조율사다. 세계적인 거장 알프레트 브렌델은 그를 ‘피아노의 천사’라고 불렀다. 한국인 피아니스트와도 인연이 깊어 임윤찬을 비롯해 조재혁·김선욱·박종해 등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그를 ‘세계 최고’로 꼽는다.

조율사는 빛바랜 음색에 숨을 불어넣어 새 영혼을 입히는 ‘음의 마법사’다. 이들이 ‘조율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도 ‘조율’이라는 직업이 가지는 매력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지난 2일(현지시간) 오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 시상식 무대에서 '쇼팽: 에튀드'로 피아노 부문에서 상을 받고 있다. 그는 울리히 게르하르츠의 피아노로 이 음반을 녹음했다. [연합]

세계적인 명장이 된 게르하르츠의 시작은 ‘우연’에 가까웠다. 건축가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이었던 그는 사촌과 함께 우연히 스타인웨이 공장을 견학을 갔다가 인생의 진로를 바꿔 버렸다. 견학 이후 그는 스타인웨이 견습생이 되기 위해 곧장 지원서를 냈고, 합격 통보를 받아 조율사로의 삶에 첫발을 딛게 됐다. 스타인웨이 로고가 선명히 새겨진 검은색 앞치마는 전 세계 모든 조율사들의 ‘꿈’이다. 스타인웨이에서 길러진 그는 38년이 지난 현재 그라모폰 수상자(알프레트 브렌델, 미츠코 우치다, 임윤찬)를 셋이나 배출한 피아노 조율의 거장이 됐다.

연주자의 일정에 동행하는 조율사는 전 세계에서도 극소수다. 대부분 연주홀과 계약한 조율사를 쓰는 것이 업계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브렌델은 그러나 게르하르츠가 늘 자신의 투어 일정에 동참하기를 원한 피아니스트였다. 게르하르츠는 브렌델의 전속 조율사이기도 하다.

피아노 조율사들의 목표는 피아니스트에게 ‘안성맞춤’인 악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정규 조율사는 “피아노도 사람처럼 각 피아노마다 모두 성향이 다르다”며 “조수미 소프라노와 방송인 박경림의 타고난 목소리가 다르듯 피아노도 각자 타고난 소리가 있어 피아노의 성향과 연주자의 요구에 맞춰 최적의 소리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게르하르츠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소리 역시 ‘피아니스트가 원하는 소리’다. 무수히 많은 피아니스트들과 콘서트홀을 경험한 그는 “피아니스트마다 원하는 소리가 다 다르고, 공연장마다 음향 특징이 달라 모든 것을 고려해 소리를 찾아간다”고 했다. 특히 브렌델은 “저음부터 고음까지 오케스트라와 같은 조화로운 음색”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피아니스트라는 게 그의 전언이다.

흥미로운 공통점도 있다.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한결같이 “따뜻한 소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게르하르츠는 김선욱이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당시를 떠올리며 “대부분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화려하고 강한 소리를 원하는데 김선욱이나 임윤찬 등 한국의 피아니스트는 따뜻함을 강조한다”며 “특히 임윤찬은 굉장히 여러 가지 소리가 담긴 다채로운 캐릭터를 원했다”고 말했다.

‘1가정 1피아노’ 시대의 종말…생계유지도 어려워진 조율사

“한국의 피아노 조율사가 있었기에 조성진, 임윤찬도 있었다.”

독일, 일본과 같은 굴지의 ‘피아노 제조사’가 있는 나라와 달리 한국의 조율 환경은 상당히 열악하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피아노 조율사는 총 1500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 중 피아노조율사협회에 소속된 회원 수는 600명 정도다.

1980~1990년대 삼익과 영창이 국내 피아노 제조사로 쌍벽을 이루던 시절, ‘1가정 1피아노’ 시대가 열렸고 동네마다 피아노 학원이 급증했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IMF 이후다. 나라 전체를 뒤흔든 불경기, 아파트의 층간 소음 문제로 피아노 수요는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피아노 보유 가정 숫자는 줄었고, 피아노를 친다 하더라도 디지털 피아노로 빠르게 전환됐다. 이에 삼익의 제조공장은 인도네시아로, 영창은 중국 톈진으로 옮겨갔다. 그래도 업계에선 열악한 환경에서도 ‘책임감’으로 이어온 조율사들이 있었기에 스타 피아니스트도 나왔다고 입을 모은다.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마포아트센터 등 주요 공연장에서 활동 중인 이정규 조율사는 “조율은 정신을 집중해서 온전히 몰두해야 하는 작업이기에 피로도가 큰 편이나, 전문 분야이고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이 있기에 보존돼야 하는 직업”이라며 “그러면서도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어 후배들에게 추천하기에는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경력과 전문성을 쌓기 위한 긴 시간 동안의 생계 유지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조성진 리사이틀 [크레디아 제공]

국내 피아노 조율사의 업무 형태는 다양하다. 초, 중,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고 교회나 학원 매장에 소속될 수도 있다. 콘서트홀에 소속되거나 전담 아티스트가 있는 경우는 명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부 조율사 뿐이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콘서트홀 조율사는 약 20명 정도로, 보수도 천차만별이다. 국내에서 업라이트 피아노(일반 보급용)를 조율할 때는 건당 15만원, 그랜드 피아노는 15~20만원을 받지만, 세계적 명장들은 이의 10~20배 이상의 보수를 받는다.

조율사 지망생들은 줄었지만, 클래식 업계에선 조율사와 같은 문화 전문 인력의 양성은 K-클래식의 성장을 위한 중요한 과제로 본다. 한국의 경우 99%의 공연장에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스타인웨이 피아노’ 조율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각각의 피아노마다 구조와 조율 방법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국내에선 유일하게 피아노 조율사를 지원하는 삼성문화재단이 게르하르츠와 같은 스타인웨이 전문 조율사를 초빙해 조율 시연과 교육을 진행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한국에서 조율사로 성장하는 과정은 지난하다. 게르하르츠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소리를 온전히 찾아내고 자신만의 감각을 익히기 위해선 오롯한 시간과 세월의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많은 조율 명장들이 “조율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직업”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율사들은 피아노를 조율하듯 삶도 조율한다. 건반 하나에 담긴 세 현이 진동하며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가듯 인생도 ‘절대음’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조율사들의 철학이기도 하다. 업계에선 삶을 조율하듯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어야 제2, 제3의 조성진, 임윤찬의 피아노에 생명을 불어넣을 조율사가 양성된다고 본다.

서 부회장은 “중국의 경우 국가에서 향후 7만 명까지 조율사를 배출하기 위한 로드맵을 세우고 있지만 한국은 나날이 어려운 환경이 돼가고 있다”며 “피아노 연주는 피아니스트와 조율사가 함께 존재해야 하는 만큼 뛰어난 K-클래식 음악가들이 배출되는 때에 그에 걸맞는 조율사들이 나올 수 있는 환경도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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