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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는 못 참아!” 30년 연하 아내는 구정물까지 퍼부었다…계속 쏘다니던 남편, 마지막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소크라테스 편]
[역사편 128. 소크라테스]

거리의 현자, 사형 선고 받기까지
알고보니 전쟁에도 세차례나 참전
무한한 질문세례 왜 그러나했더니
부인은 악처 오명…실상은 달랐다?
레이어 반 블로멘달, 소크라테스와 두 아내, 그리고 알키비아데스(일부 확대), 1660년경, 캔버스에 유채, 210x198cm, 발랑시엔 미술관
오토 반 벤, 남편 소크라테스를 저주하는 아내 크산티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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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7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철학자
루이스 르 브룬(Louis Joseph LeBrun), 소크라테스의 연설, 1867, 캔버스에 유채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죽음의 길, 당신들은 삶의 길로 가게 됩니다." (소크라테스. 사형 선고를 받은 직후)

기원전 399년, 아테네 법정. 배심원 500명은 소크라테스의 사형 여부를 놓고 찬반 투표를 했다. 결과는 찬성 360표, 반대 140표였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꼼짝없이 사형수였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색은 그대로였다. 기꺼이 죽음의 길로 가겠다는 말 따위만 한 채 물러설 뿐이었다. "…하지만 여러분. 삶과 죽음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길인지는 신만이 아실 겁니다." 이처럼 아리송한 말만 덧붙이며 끝끝내, 태연히.

안토니오 잔키우스, 소크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가 간 곳은 아크로폴리스 필로파포스 언덕에 있는 감옥이었다. 좁은 방 세 칸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바위굴에 가까운 시설이었다.

사실 이 무렵에도 소크라테스가 진짜 죽으리라고 믿는 이는 없었다.

겉으로는 당당한 소크라테스였지만, 그 또한 막판에는 무슨 수를 쓰든 형벌 수위를 낮출 것으로 다들 예상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는 별로 바쁠 게 없어보였다. 높으신 분을 향해 청탁 담긴 편지 한 줄 쓰지 않고, 간수에게조차 뇌물이랍시고 봉투 하나 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소크라테스의 친구와 제자들이 팔을 걷었다.

친구 크리톤과 제자 플라톤 등이 소크라테스의 감옥을 찾았다. "뒷돈으로 쓸 재산이 없어서 그러는가?" 친구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물었다. "우리가 다 감당하겠네. 간수부터 매수하겠으니 도망칠 준비를 하시게." 이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튀어나온 두 눈을 끔뻑였다. 이제 곧 감동의 눈물을 쏟고, 고마움의 미소를 지을 줄 알았지만…

장 프랑수아 피에르 페롱, 소크라테스의 죽음(일부 확대), 1786~1787, 캔버스에 유채, 114.4x149.7cm, 덴마크 국립 미술관

"그렇게 할 수는 없소."

소크라테스가 보인 반응은 이게 전부였다. 그는 여전히 얄미울만큼 평온했다. "대체 왜?" 크리톤이 따지듯 물었다. "나는 지금껏 아테네의 법률 속에서(법률을 지키면서) 잘 살았소. 단지 내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어기면 되겠는가." 그간 법 덕에 잘 살아놓곤 갑자기 법 때문에 살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억울하다고 해 이를 어기면 또 같은 일이 생길 수 있고, 그러면 아테네도 바로 설 수 없소. 이보게, 친구. 생명이나 자식, 다른 어떤 일보다 먼저 정의를 생각하게." 소크라테스의 말에 크리톤이 한숨을 내쉬려던 때, 복도에서 발을 끄는 소리가 울렸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병사가 독배(毒杯)를 든 채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찰랑이는 잔을 소크라테스에게 건넸다. 이를 본 늙은 사형수의 친구와 제자들은 눈물을 쏟았다. 이 고집불통 노인네가 꿀떡 마실 것을 알기에 더욱 크게 훌쩍였다.

장 프랑수아 피에르 페롱,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6~1787, 캔버스에 유채, 114.4x149.7cm, 덴마크 국립 미술관

"나의 친구, 제자들이여. 우리는 육체 때문에 빚어지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소."

독이 든 잔을 쥔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방해 없이 오직 지혜만 추구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신이 정해준 때 기꺼이 육체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오." 장 프랑수아 피에르 페롱이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속 소크라테스는 최후의 순간, 손바닥을 하늘로 든 채 이러한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는 듯보인다. 소크라테스는 거침없이 잔에 손을 대고 있다. 그런 그가 안타까운 동년배 친구들은 고통스러워한다. 침대까지 다가와 막아서는가 하면, 벌써 몸을 가누기 힘든 듯 스르르 쓰러진다. 비교적 젊은 외관의 제자들 또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표한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고, 다른 이에게 기대 통곡하는 식이다.

장 프랑수아 피에르 페롱,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6~1787, 캔버스에 유채, 114.4x149.7cm, 덴마크 국립 미술관

이런 와중에도 소크라테스는 단호하다. 덥수룩한 얼굴과 때가 탄 듯 까매진 발바닥, 허름한 복장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초연하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칭해지는 그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당시 세상이 어땠기에 독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까.

손 꼽히던 추남의 반전
존 러 퍼지, 개인과 국가의 관계, 1905

동시대 여러 자료에선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469년 아테네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손에 꼽힐 만큼 추남이었다. 그 시절 '소크라테스처럼 생겼다'는 게 모욕으로 칭해졌을 만큼 못생긴 사람이었다는 말이 있다. 개구리 같은 눈과 돼지를 닮은 코, 작고 통통한 항아리를 닮은 몸의 그는 멀리서도 단연 돋보였다는 게 지금도 전해지는 이야기다.

P. V. Basin, 전쟁 중 알키비아데스를 보호하는 소크라테스

다만 겉모습만 그럴 뿐 그는 철학부터 과학, 천문학, 기하학 등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비범한 면을 보였다.

체력과 정신력에서도 남다른 강인함을 갖추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마흔이 넘어서까지 전쟁에도 세 번이나 나섰다. 중장갑 보병으로 근무한 그는 한여름에도, 한겨울에도 힘든 기색 한 번 보이질 않았다. 평시에는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연병장 한가운데 선 채 꿋꿋이 사색을 했다. 큰 전쟁터에 있을 때도 다친 전우가 보이면 곧장 구하고, 그러다 퇴각 명령이 떨어져도 주변부터 챙겼다고 한다.

후세페 데 리베라, 거울을 보는 철학자

타고난 힘과 의지, 꾸준한 사색과 명상,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만 겪을 수 있는 극한 경험….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내공을 갈고닦았다. 그리고, 전쟁 등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늘 그만의 무대에 올라섰다. 여기서 무대란 온갖 사람들이 나다니는 광장과 시장 한복판을 의미했다.

질릴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선생님. 민중을 정의할 수 있습니까?"
"그야 당연히 가난한 사람이지요."
"가난한 사람이라면 어떤 이를 뜻합니까?"
"돈이 없는 이들이지요."
"부자도 늘 돈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자도 가난한 사람입니까?"
"그 점에서는 그렇겠지요."
"민주주의는 민중 중심의 정치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가난한 이를 위한 제도입니까, 부자를 위한 제도입니까?"
"아, 음…. 그건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와 시민의 대화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녹색옷을 입은 소크라테스 부분 확대), 1511, 프레스코화, 550x770cm, 바티칸 미술관

거리의 소크라테스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아무나 붙잡았다. 다짜고짜 물었다. 응수하면 거기에 또 물음표를 던졌다. 그 행동은 상대가 자기 말에 모순을 느낄 때까지 이어졌다. 정의란 무엇입니까. 사랑과 우정은 어떻게 구분합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소크라테스는 질문과 무한한 되물음을 통해 답변자의 각성을 이끌었다. 평생 잘 알고 있다고 여긴 개념조차 오류 덩어리로 설명하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했다. 라파엘로 산치오의 대표작 〈아테네 학당〉에서 소크라테스의 당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벗어진 머리, 다소 투박한 눈코입을 가진 소크라테스가 상대방을 보며 따지듯 묻고 있다.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과 사나운 인상, 주변 인물들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행색 등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다.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1511, 프레스코화, 550x770cm, 바티칸 미술관

소크라테스는 본인의 이 화법을 '산파(産婆)술'로 칭했다.

결국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이는 산모다. 자신(산파)은 직접 상대를 가르치지 않고, 상대방(산모)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지혜를 터득할 수 있도록(출산) 거들 뿐이라는 얘기였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시절 지식인을 표방했던 소피스트(Sophist)의 영향이 가장 컸다. 철학자와 변호사, 논술 강사 등을 합친 개념의 이들은 시민에게 비싼 돈을 받고 말솜씨를 가르쳤다. 당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라는 걸출한 지도자 아래 번영기를 누리고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는 문제가 되지 않을 때 문화도 꽃피는 법이다. 철학이든, 예술이든 보이지 않는 개념을 논하기 위해선 웅변과 토론이 필요했다. 조리있게 말하는 법, 명징하게 표현하는 방식 등 기교는 필수 덕목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소피스트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다.

니콜라 앙드레 몽시오(Nicolas-André Monsiau),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와 대화하는 아스파시아, 1801, 65x81cm, 푸시킨 국립 미술관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궁금했다.

그는 그간 목숨 걸고 명상했다. 생사를 넘나들며 사색했다. 그럼에도 아주 간결한 개념 하나 제대로 정의하지 못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다. 아낀다는 건 무슨 뜻인가. 잃어버리기 싫은 마음이다. 잃어버린다는 건 정확히 어떤 상황인가. 물리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그건…. 이런 식이었다. 계속 의문을 던질 수 있었다. 무슨 말을 떠올리든 끝없이 물어볼 수 있었다.

소피스트라면 다를까. 추가 질문을 턱 막을 만큼 명징한 대답을 내놓을까.

소크라테스는 한 물음에서 딱 하나의 답변만 내놓을 수 있다면 세상은 더 쉽게 나아질 것으로 여겼다. 정답이 버젓이 있다면 굳이 오답을 택하지 않으리라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 무리를 찾아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들 모두 그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에 결국 절절 매기만 했다.

“내가 가장 현명한 사람? 설마…”
루카 조르다노, 소크라테스

실망감만 깊어지고 있을 때, 소크라테스는 한 사건을 통해 깨달음을 경험했다. 나이가 마흔 줄에 닿은 무렵이었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기는 한가요?"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레폰이 지식을 갈구하는 이 미련한 철학자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델포이 신전을 찾아 이렇게 물어봤다. 예언의 신 아폴론이 거느리는 무녀가 전한 말은 간결했다. "없다." 이게 다였다. 소크라테스를 카이레폰이 전한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소크라테스도 딱 하나 자신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 자체였다. 이런 상태야말로 무엇이든 아는 척을 하는 다른 지식인보다 '지혜로운' 부분이었다.

피에트로 델라 베치아, 소크라테스와 두 제자, 1626~1678, 캔버스에 유채, 103x120cm, 프라도 미술관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모든 진리의 출발점 또한 여기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무지의 지(知)를 설파하는 소크라테스는 주로 거울을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피에트로 델라 베치아의 그림처럼 남에게 일단 본인 모습부터 보여주는 식이다. 델포이 신전 기둥에 쓰인 말, 너 자신을 알라. 즉, 너는 네가 무엇도 모른다는 점부터 성찰하라는 가르침을 주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악처 오명’ 크산티페의 속사정
레이어 반 블로멘달, 소크라테스와 두 아내, 그리고 알키비아데스(일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와 미르토, 두 여인을 아내로 뒀다고 한다. 블로멘달은 이를 반영해 물을 뿌리는 여인을 크산티페, 그 앞 여인을 미르토로 표현했다), 1660년경, 캔버스에 유채, 210x198cm, 발랑시엔 미술관

그런 소크라테스를 막 대하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아내 크산티페였다.

크산티페는 질문 중독자인 소크라테스가 예쁘게 보일 리 없었다. 남편이란 자가 아침이면 광장과 시장, 길거리를 쏘다니며 온갖 사람과 논쟁을 한다. 점심이면 친구니, 제자니 하는 이들과 또 한바탕 갑론을박을 한다. 저녁이 되면 웬 부자나 정치인 집에 초대받아 그놈의 토론을 밤새도록 벌인다.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않은 채 잊을 만하면 집에 기어들어온다.

그러는 동안 소크라테스보다 무려 서른 살쯤 연하였던 크산티페가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돈도 벌어야 했고, 육아에 모든 잡일까지 알아서 해야 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로 인해 깨달음을 얻는 이가 늘수록, 크산티페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악처(惡妻)의 대명사처럼 된 그녀지만, 사실은 이런 뒷사정이 있었다.

루카 조르다노, 소크라테스의 목덜미에 물을 붓는 크산티페, 1660년경,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술상 좀 차려주시게!"

한번은 소크라테스가 크산티페를 향해 대뜸 소리쳤다. 제자를 우르르 몰고와서는 꺼낸 말이었다. "아이고, 이 태평한 인간아!" 설움에 북받친 크산티페는 씩씩대며 부엌으로 갔다. 그녀가 갖고 온 건 구정물을 가득 채운 바가지였다. 루카 조르다노의 〈소크라테스의 목덜미에 물을 붓는 크산티페〉처럼 살금살금 다가가선 이를 확 끼얹었다. 제자와 토론할 거리를 뒤적이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휑한 머리가 흠뻑 젖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한 제자의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허허 웃었다. "원래 천둥이 친 후에는 비가 오는 법이야." 이러니 크산티페만 또 가슴을 칠 수밖에.

거리의 현자, 공공의 적으로
요한 빌헬름 알렉산더 노스베크,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1831, 캔버스에 유채, 214x287cm, 이르쿠츠크 미술관

이와 별개로 소크라테스의 신봉자는 착실히 늘고 있었다.

그러자 권력층이 소크라테스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무찔렀다. 점령군이 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제를 흔들었다. 과두정(寡頭政)을 표방한 친스파르타 세력, 반(反)민주주의를 주장한 아테네 내 일부 집단으로 30인 집권 체제를 꾸렸다. 이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눈엣가시였다. '진리의 민주화'를 꾀하는 위험인물이었다. 다만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인 위협은 받지 않았다. 권력을 쥔 서른 명 안에서도 그의 추종자가 섞여있던 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테네는 곧 다시 민주주의 체제를 회복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주 세력이 소크라테스를 도마 위로 또 올렸다. 모든 권력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기보다 따르는 이가 많은 사람을 가만두지 못한다는 게 그것이다. 이쯤 소크라테스는 진영과 상관없이 권력층 내 공공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죄목 1. 젊은이를 타락시켰다.
죄목 2. 국가가 지정한 신이 아닌 이상한 신을 믿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겪은 청년은 충격 속 사색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권력층은 새로운 세계에 눈뜬 청년들의 이런 모습을 제멋대로 해석해 혐의로 짠 것이었다. 아울러 소크라테스는 시민을 향해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강조했다. 고소인들은 이를 놓고도 '우리 신이 아닌 다른 신을 따른다'며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해 일을 벌인 것이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처벌을 건 재판이 열린 이유였다.

요한 빌헬름 알렉산더 노스베크,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1831, 캔버스에 유채, 214x287cm, 이르쿠츠크 미술관

확실한 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사과나 애원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 속 소크라테스는 능숙하게 스스로를 변호한다. 그런가 하면, 크세노폰의 기록 속 소크라테스는 "새점 치는 인간은 놔둔 채 나만 갖고 그러느냐"며 능청스럽게 항의하기도 한다. 500명 배심원의 1차 투표 결과는 유죄 280, 무죄 220. "내가 죽으면 여러분이 내게 가했던 일보다 훨씬 더 가혹한 형벌이 여러분을 덮칠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자기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2차 투표를 앞두고도 떳떳했다. 이어진 투표에서 사형 찬성으로 360표가 몰린 건 이 때문이었다.

“나는 신이 보낸 등에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일부 확대), 1787, 캔버스에 유채, 130x19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바위굴 같은 감옥에 갇혔다.

청탁이든, 뇌물이든 그곳에서 빠져나갈 생각 따위 하지 않고, 친구와 제자의 설득에도 고집을 꺾지 않은 그가 받아든 건 독초로 만든 극약이었다. 이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소크라테스의 죽음〉일 것이다. 친구 크리톤은 아직 미련을 떨치지 못한 듯 소크라테스의 무릎을 잡는다. 플라톤은 침상 끝에 앉아 일찌감치 애도를 표하는 양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모은다. 플라톤은 당시 20대 청년이었지만, 그의 철학계 입지를 고려해 일부러 늙은 모습으로 그렸다는 점도 눈길 끄는 지점이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감옥 뒤편 계단을 통해 퇴장하고 있다. 곧 펼쳐질 비극에 쓰러질 수 있으니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캔버스에 유채, 130x19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여러 기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역시나 독약을 단숨에 삼켰다.

일흔 넘은 이 노인은 여전히 건강한 육체, 그리고 건전한 정신을 지켜왔기 때문일까. 독이 퍼지지 않았다. 독이 빨리 돌도록 감옥 안을 한참 걸어 다녀야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어느 순간 다리가 무겁다며 반듯이 누웠다. 병사가 종종 그의 발을 꾹꾹 누르며 감각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잠들듯 죽었다고 한다.

자크 필립 조셉 드 세인트 쿠엔틴, 소크라테스의 죽음, 1762, 캔버스에 유채, 140x115cm, 에콜 데 보자르

"나는 아테네를 위해 신이 보낸 등에였다."

소크라테스가 생전에 남긴 말이었다. 큰 황소도 등에가 급소를 쏘면 펄쩍 뛴다. 존재를 안 순간 늘 긴장해야 한다. 녀석을 피하려면 늘어져 있을 수도, 잠깐의 한 눈도 팔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철학을 이성적, 반성적, 비판적 방향으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세상이 늘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생기를 품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때도 시민의 스승이었던 그는 지금도 만인의 스승으로 울림을 주고 있다.

장 프랑수아 피에르 페롱(Jean Francois Pierre Peyron·1744~1814)
프랑스의 화가 겸 판화가, 미술품 수집가. 아기자기한 로코코 화풍이 여전히 좋은 평가를 받는 시절, 명징한 신고전주의 화풍을 받아들인 선구자격 인물로 최근 다시 각광받고 있다. 동시대 유명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라이벌이었다. 다만, 당시 평론가들에게 다비드 이상의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고 한다. 다비드는 훗날 페이론의 장례식에 참여해 "그가 내 눈을 뜨게 해줬다"며 각별한 감정을 내보였다. 대표작은 그에게 로마상을 안긴 〈세네카의 죽음(현재 소실)〉.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 코르넬리아〉, 〈알케스티스의 죽음〉 등도 높은 작품성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1634~1705)
나폴리에서 출생한 이탈리아 화가. 가벼운 선, 다양한 색채를 중시한 그는 바로크 화풍이 로코코 화풍으로 넘어가던 시절 가교가 됐다는 평도 있다. 작업을 빠르게 마친다는 점에서 '번개(Fulmine)', 다룰 수 있는 장르와 기법이 다양하다는 점에서 '프로테우스(Proteus·그리스 로마 신화 속 변신에 능한 바다의 신)' 등으로 불렸다. 고향 나폴리, 그리고 로마와 피렌체, 베네치아 등에서 주로 활동했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의 초청장을 받은 그는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의 천장화 작업에도 참여했다. 대표작은 〈비너스(아프로디테)와 마르스(아레스)〉, 〈동방박사의 경배〉 등.

〈참고 자료〉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플라톤, 소크라테스, 현대지성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아카넷

소크라테스 회상록, 크세노폰

틸리 서양철학사, 프랭크 틸리, 현대지성

철학의 역사, 나이절 위버턴, 소소의책

안토니오 카노바, Philosophy & Socrates
기자의 말풍선
지난주 독자님들께서 댓글로 소개하신 책들을 왕창 구해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올 연말 처음으로, 갓 구운 붕어빵도 입천장이 부을만큼 열심히 먹었습니다(저는 바삭한 꼬리부터 먹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그리고 식욕의 계절인가 봅니다.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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